시와 사랑

고남산

소순희 2009. 3. 25. 07:35


                                  고남산

                            눈 내리는 고남산
                            무아지경
                            그 산 바라보기
                            수 십년
                            나는 속수무책
                            산은 산대로
                            나는 나대로
                            자신을 버릴 수 있을까

                            비 내리는 고남산
                            정중동
                            그 산 바라보기
                            수 십년
                            초록은 초록대로
                            붉음은 붉음대로
                            그 모습 그 자리
                            나는 늘 수시변덕
                            산은 산대로
                            나는 나대로
                            다 버리고
                            초연 할 수 있을까.

                                                      01.소순희

                  846m고향 뒷산. 눈뜨면 바라다보이는 산!
                  늘 거기 그 자리에 엎드려 온갖 것 다받아준다.
                  내 어린 뼈가 자라고 추억이 숨어있는 곳.
                  멀리 떠나와 있지만 난 오늘도 그 산을 본다.
                  아버지의 듬직한 등 같았고 때론 엄니의 포근한
                  품 같았던 산.사계를 안고와 내게 부려주고 몇 걸음
                  물러가 꼼짝않고서서빙그레 웃던 산.
                  이제 중년의 나이에 들어와 그 산을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내게 주던 의미들을...



                                             <고남산/ 10F/소순희作/1998/김미숙님소장>


                                                                              <우리고향/고남산 846m/사진.소순희>


♣ 고남산(高南山 846.4m 남원시 산동면 운봉읍)
백두대간의 거대한 산줄기가 백두산 장군봉을 출발하여 지리산 천왕봉까지 남으로 1,621,5km를 뻗어간다. 전북지역의 백두대간 산줄기는 민주지산 삼도봉에서 시작되어 대덕산·삼봉산·덕유산향적봉 어깨·육십령·깃대봉을 지나 장수 영취산에서 서북쪽으로 금남호남정맥을 나누어 놓고, 백운산·봉화산을 지나 고남산을 솟구쳐 놓고, 지리산 방향으로 뻗어간다. 고남산 남동쪽의 물줄기는 광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북서쪽은 요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합수된다. 행정구역은 남원시 산동면 중절리·운봉읍에 위치해 있다.
  남원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운봉 여원재에서 북쪽 끝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바로 이산이다. 그리고 남원에서 88고속도로를 달리다 지리산휴게소 중간쯤이나 남원에서 운봉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정상 부근에 거대한 중계탑이 서 있는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이 산은 또 운봉평야에 우뚝 솟아올라서 예부터 전쟁터와 격전지의 방어선이 되곤했다. 지역 주민들은 고남산을 태조봉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고려말 우왕 6년(1380)에 왜구 2천명을 이끌고 인월면 인월리에 본진을 둔 왜장 아지발도에 맞선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변안렬을 참모로 삼고, 퉁두란을 아장으로 삼아 1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을 출발하여 전주 한벽당에 잠시 쉬었다가 대오를 정비한 뒤, 남원에 도착하였다. 이때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출발할 때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크게 노하여 불길하다 하여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뒤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한 뒤, 이 산의 이름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불렀다. 고남산 아래에 주둔할 때 군사와 말들의 식수로 썼던 샘터 주변에 터를 잡은 권씨 마을은 권세가 하늘에 닿도록 끊임이 없다 하여 권포리(權布里)라 하였다.
  그리고 여원재에서 고남산 초입에 있는 마을의 지형을 이성계를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지형을 살펴보니 고남산의 산줄기가 이 마을까지 뻗어내린 모양이 마치 긴 다리를 놓은 것 같아 '장교리(長橋里)'라 지었고 이씨와 김씨가 번성할 것으로 예언했는데 오늘날 이씨와 김씨가 평화롭게 살고 있다.

봄에는 철쭉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녹음방초, 가을에는 단풍, 겨울은 하얀 눈이 덮여 있어 절경을 이룬다. 섬진강의 젖줄기인 요천수를 통하여 산동평야의 기름진 옥토에서 생산된 쌀을 임금에게 진상미로 올렸다는 부절리(釜節里)가 서북쪽으로 지척이고, 동으로 중계소를 지나는 백두대간 능선길이 보인다. 남동으로 운봉, 그 너머로 백두대간 줄기인 지리산 연봉들이 천왕봉과 함께 다가온다. 그러나 정상 부근에는 중계소 시설과 헬기장, 권포리에서 시멘트 도로가 개설되어 자연경관을 훼손시키고 있다. 정상에서 동북쪽의 백두대간 능선은 길이 좋은 반면, 서쪽 산동면으로의 하산 길은 등산로가 희미하다.

문화유적 및 명승지
여원재 마애여래불상(女院峙)
해발 470m 여원재(여원치:女院峙) 정상 암벽에 여신상(女神像)이 있으며,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고남산(古南山)이 있다. 그 고남산의 해발 약 850m 정상에 있는 산신제단은 600년 전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왜구를 정벌할 때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왜구는 호남 곡창지대를 침범한 후에 전주(全州) 공주(公州)를 거쳐 서울까지 진격할 계략 하에 고려 우왕(愚王) 6년(1380)에 부산·진주·함양을 거쳐 남원군 인월면 일대를 점령, 상군리(上軍里), 중군리(中軍里), 소군리(小軍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왜구의 부장에는 당시 나이 15세에 불과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선봉장이 되어 닥치는 곳마다 살인·방화·약탈·파괴 등 갖가지 만행을 부리며 이 땅을 짓밟고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이성계 장군과 변안열(邊安烈)·퉁두란(퉁豆蘭) 등이 왕의 명을 받고, 전주·남원을 거쳐 운봉(雲峰)을 향해 진군하던 중 아흔아홉 구비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이성계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가 고개 정상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가리더니 비몽사몽간에 노파(老婆)(비문에는 도고(道姑)라 되어 있다) 한 분이 이성계 장군 앞에 나타나 왜구와 싸울 시기와 장소 방법을 일러 주었다. 그 노파는 당시 경남 함양지방의 미모 단정한 주부였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자기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한 원신(怨神)으로서 노파로 변신하여 이성계 장군께 전략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여원재 여신상은 왼쪽 젖가슴이 없으며 그 노파가 지적하여 준 결전의 장(場)이 곧 운봉 황산(荒山)이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왜적이 함양을 유린하고 남원성을 향하는 도중 여원재 주막에서 술을 청하여 진탕 마시다 얌전한 주모를 위협하여 주모의 손목과 젖가슴을 만지며 방자한 행동을 하였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난 주모는 비분하여 부엌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후 이런 주모에 대한 소문이 퍼져 이곳 주민들은 그 주모의 절개를 높이 기리기 위하여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그녀의 제각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그 여인의 몸에서 물이 흘러 그 아래 마을 밭에서 자라는 풀이 쪽(藍)빛으로 변하였다고 하여 지금도 그곳 지명이 남평리(藍坪里)로 되어 있다.
  그 사연이 있은 뒤부터 이 고개 이름을 여(女) 자(字)를 붙여 여원재(여원치:女院峙)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여인의 원혼이 산신 할머니로 변하여 왜구 토벌을 위해 병막동에 잠시 주둔하던 이성계 장군의 꿈에 나타나 전승을 계시하였다고도 전한다.
   이성계 장군은 노파의 전략에 따라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성계 장군은 정성을 다해 노파를 만났던 여원재 석벽에다 왼쪽 젖가슴이 잘린 여상(女像)을 새기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여상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산신각(山神閣)을 지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신각은 허물어지고 여상만 남아서 풍우에 시달리고 이끼가 끼어서 그 형상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옛 노인들의 전언(傳言)에 의해 알게 된 운봉현감 박귀진(朴貴鎭)이 광무 5년(1901) 7월, 산신각과 여상을 복원한 그 옆에 이 여상의 연유에 대한 비문을 새겨 놓았으니, 그 비문은 오늘까지도 그곳에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산신각은 허물어져 그 흔적만 남았고 여신상은 풍우에 시달린 채 600년 전 호국의 얼을 상징하고 있다. 다만 비문의 어떤 부분은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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