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112

Christmas

늘 그래 왔듯이 해마다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일로 정해졌지만 정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사랑의 확증으로 세상에 성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죄악을 사하여 주신 주님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날이 성탄일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뒤바뀐 상황설정으로 우리는 얼마나 주님 오심에 비중을 두는가 말이다. 크리스마스하면 예수그리스도보다 산타클로스가 떠올려지니 참, 아이러니하다. 예수님은 문밖에서 추위에 떨고 계시는데, 주님 탄생일에 끼어든 산타클로스 영감의 혈색 좋은 얼굴에 웃음 띤 모습으로 빨간 코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와 전해준다는 양말 속 선물에 마음이 쏠려버린 크리스마스는 의미가..

다시, 가을

다시, 가을 소순희 해마다 찾아오는 가을이지만 해마다 다른 의미로 전달되는 또 한 해 가을이다. 멀미 나도록 짙푸른 푸른 거북등 같던 숲도 어느새 그 왕성함을 내려놓았다. 바라보는 산마다 오색으로 흘러내린 능선과 골짜기는 천연 비단결이다.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로 인한 태양의 남중 고도로 변화되는 계절의 섭리를 신께서 주관하심이 나이 들어 가면서 더 절실히 새겨진다. 지루해질 때쯤 변화를 끌어내는 그 은총을 어이 감사치 않을 수 있으랴! 스물다섯 무렵 처음 북한산 뒤쪽 풍경을 접하고부터 해마다 그곳을 찾게됨이 30여 년이 넘었으니 지루할 만도 한데 볼수록 감회가 새롭다. 북한산 사기막골에서 바라본 인수봉과 숨은벽 그리고 백운대는 거대한 암벽처럼 버티고 있음이 남성적이다. 송추방향으로 좀 더 북향하면 도봉의..

그 누님에 대한 추억과 회한

그 누님에 대한 추억과 회한 소순희 그 누님이 실성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아마 가을걷이 후의 빈 들판이 늘어 갈 즈음으로 기억한다. 실지로 누님은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다녔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퀭한 눈이 깊었다. 초등학교 1~2학년인 아이들의 입에선 거침없이 미친년이라는 욕설과 함께 그 누님이 가는 길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사람을 포진한 채 놀리며 흙이 붙은 벼 포기를 던지고 작은 돌을 집어 위협하곤 했다. 그게,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악함이 발동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잔인성으로 표출되는 일종의 군중심리로 작용한 본질적 죄성이리라.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같은 맘을 지닌 이유에서 누가 선한 사람으로 남아 과연 그 어린 녀석들의 행위에 침을 뱉겠는가. 나도 그 못 된 대열에 합류한 ..

쥐 소순희 "아. 그 잿더미에서 불이 붙은 거 아녀?" "몰라 아척에 재에다가 물 뿌리고 갔다 놓았당께" 용식이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죄인처럼 조아렸다. 타다 남은 헛간 기둥과 서까래가 숯덩이로 검게 남아 있는데 실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아, 글쎄 안채에 엥겨 붙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먼" 땀이 흐른 어른들 얼굴엔 불을 끄느라 검은 검댕이 묻은 코끝과 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쪽에선 쇠스랑으로 초가지붕을 찍어 걷어 내고 물을 비워 낸 바케스가 휙휙 마당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여섯 명의 어른들이 타오르는 불길을 간신히 잡았다. 용식이네 마당 북쪽으로 지어진 헛간이 반 이상 타 버렸다. 이젠 안심이란 듯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마을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겨울 노을이 스러지고 있었다. 눈이 녹을 ..

운동화 도둑

운동화 도둑 소순희 종례를 마치고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급우들 뒤로 엇비쳐드는 서녘 햇살 줄기 속에 뽀얀 먼지가 떠다닌다. 복도 한쪽 벽 붙박이 신발장엔 한 켤레의 신발도 남지 않았다. 나는 순간 아찔하다. 이 주일 전에 새로 산 내 운동화가 있어야 할 41번 자리에 없다. 몇 번이고 교실을 돌아보고 신발장을 기웃거려 봐도 칸칸이 비어 있다. 울컥 목울대까지 치켜드는 상실감에 막 눈물이 나며, 어머니 얼굴이 오버랩 된다. 검정 운동화 한 켤레로 한 학기를 버텨온 터라 닳아빠진 발바닥 밑에 밟히는 작은 돌의 촉감과 수없이 빨아 희끄무레 색 바랜 운동화의 앞머리 부분과 너덜거리는 뒤꿈치, 그리고 끈을 꿰는 눈이 두어 개 빠진 낡은 운동화를 어머니께 보이며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어렵사리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

사랑과 미움

사랑과 미움 소순희 초등학교 2학년 그해 가을까지 나는 한글을 읽지 못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고도 오랜 뒤, 밤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어느 밤부터 나는 이웃 선예네 마실 가는 큰 누나를 따라가 숙제로 내어 준 국어책 한 단원을 몇 번이고 따라 읽으며 차츰 한글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국어 시간에 담임 성낙형 선생님께서 그 단원을 펴시며 읽어 볼 사람? 하신다. 나는 슬며시 손을 들었고 한글을 읽지 못한 나를 놓칠 리 없는 선생님은 "순희 읽어봐!" 하신다. 어젯밤 늦도록 외우다시피 한 글을 읽기 시작 했고 한글을 읽지 못한 애가 줄줄 읽어 내려가자 선생님과 반 애들은 의아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리라. 다 읽자, 선생님은 그윽한 눈빛으로 "자 박수!" 하며 먼저..

박준지 선생님

박준지 선생님 소순희 2016 사 학년 여름방학 끝 무렵이었지 싶다. 나는 까맣게 탄 얼굴에 윗옷은 엷은 포플린 남방셔츠 하나 걸친 것 아니면 거의 벗고 사는 터라 흙빛 등은 어깨뼈가 유난히 드러났고 갈빗대가 드러난 가슴엔 간혹 하얗게 손톱자국이 줄을 긋곤 했다. 그날도 돌담을 끼고 돌아가는 산밑 길로 나뭇잎 무늬가 그려진 반소매 남방셔츠를 벗어 휘휘 돌리며 지름길인 순구 형네 밭둑을 지나 용식이네 집으로 마실을 가고 있었다. 방죽골로 접어드는 초입엔 오래된 류 씨 집안 제각을 관리하는 용식이네 집이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 고즈넉이 누워 있었다. 막 밭둑을 내려와 길 가장자리로 몇 걸음 후루룩 내려오는데 나는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그곳 탱자나무 그늘에 그토록 보고팠던 선생님이 나를 보며 웃고 서 계..

할미꽃과 아이

할미꽃과 아이 소순희 여섯 살 봄 지금 생각하면 꿈속 같다. 무엇인가 땅에서 흐물흐물 피어오르는 봄날, 하늘에선 노고지리가 지저굴지저굴 노래하며 공중 한 자리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한 봄날은 여섯 살 내게 천국 같았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용식이와 나는 자갈투성이 범벌 들판에서 놀다 여기저기 돋아난 풀섶에 솜털 보송한 할미꽃이 고개 숙인 채 피어 있는 걸 보았다. 어린 마음에 꽃이 예쁘다고 생각되어 들춰 본 꽃 속은 진자줏빛 속살과 동그랗게 원을 그린 노린 꽃술이 곰실거렸다. 나는 꽃줄기를 잡고 뽑다시피 몇 줄기를 끊어냈다. 손에서 금방 축 늘어졌다. 저만치서 자갈을 던지며 놀고 있던 용식이가 가까이 오더니 "너, 그 꽃 뭣 할려고 꺼껀냐?" "응, 집에가서 꽃병에 꼬자 놀라고..." "그 꽃 꺼끄면 ..

직박구리의 겨울

직박구리의 겨울 사과 한 쪽이 상처가 나고 짙은 갈색으로 변해가자 아내는 버리려고 골라 두었다. 장수 누님이 보내준 사과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깝지만 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 주변을 둘러싼 과수원이 붉은 열매를 내보이는 늦가을엔 풍요로움에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누님의 밭 가에도 사과나무 몇 그루가 해마다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그중 잘 익은 사과를 보내 준 누님의 열일곱 살 적 붉은 볼이 떠 올랐다. 겨울은 새들에게도 시련의 계절이다. 인가 가까이 날아든 배고픈 조수들의 먹이 찾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사과를 집어 들고 출근하며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소나무 가지 사이에 사과를 올려 두었다. 다음 날 아침 눈아래 뺨에 갈색 무늬와 회색의 가슴팍에 하얀 점이 박힌 까만 눈의 직박구리가 사과..

정선에서의 하루

정선에서의 하루 기차는 새벽 3시경에 도착했다. 인적 드문 산골의 선평역 새벽 시간엔 역무원도 없다. 개찰구에 표를 던지고 나오자 낮은 지붕의 집들이 검게 엎드려 있다. 청량리역에서 늦은 밤 강릉행 기차를 타고 증산역(지금은 민둥산역)에서 다시 3량으로 갈아타는 구절리역이 종점인 기차는 밤 별을 머리에 이고 산 골골을 돌아 줄곧 달려왔다. 산골의 11월은 이미 겨울이 들어서고 온 누리가 적막하다. 졸다 깬 눈이 퀭한 사람 몇몇이 내려갈 곳으로 다 간 다음, 눈 붙일 여인숙이래도 찾을 양으로 역사를 나와 골목을 헤매었지만, 나그네가 쉴 곳은 없다. 불 켜진 집 대문을 두드려도 인적은 없고 개 짖는 소리만 마을에 퍼진다. 제자 왕근이와 스케치도 할 겸 사진도 찍어야 하는 하루가 바쁘게 열리는 새벽이다.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