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113

복숭아의 추억

복숭아의 추억 소순희 여름이 오면 유독 복숭아의 추억이 그 시절로 나를 끌어간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봄에 집에서 40여 리의 시내 중학교에 나는 어렵사리 입학 했다. 6학년 가을 아버지가 산에 드셨고, 마을 어른들은 상급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와중에 몇몇 분은 그래도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친구들은 하숙집으로 들고 나는 시내에 방 하나를 얻어 혼자 자취를 했다. 저녁이면 연탄불을 갈고, 아침이면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일주일 내내 김치 한 가지만으로도 내겐 성찬의 축복이었다. 중학교도 못 갈 형편에 내겐 감지덕지했다. 주눅 든 날을 교정의 구름 같은 벚꽃과 학교 울타리 너머로 굉음을 내며 언덕을 기어오르는 서울로 가는 기차를 보며 조금씩 학교 생활에 익..

숙자

숙자 그날도 쉬는 시간에 교실에선 숙자를 둘러싼 아이들이 연필깎이 칼로 삐져낸 모과를 얻어 씹고 있었다. 교실 안에 꽉 찬 모과 향이 코끝에 와 닿는 가을은 유리창 속으로 햇볕이 투명하게 걸러지고 있었다. 나도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었지만 내게는 모과 한쪽도 쥐어지지 않았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노랗고 커다란 과일 모과를 처음 보았다. 얼마나 탐스럽고 먹음직하게 생겼던가! 몇 명의 반 애들에게 잘라주고 남은 모과를 몰래 잘라 입에 넣어 보았다. 맛이라곤 텁텁하고 시큼한 나무껍질 씹는 기분이라 뱉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모과의 맛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숙자는 내 짝이었다. 작은 체구와 유난히 흰 얼굴에 박힌 눈은 가늘게 일자로 누운 게 인상적이다. 약간의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웃을 때는 입가..

목 디스크 파열

목과 어깨가 아프기 시작한 지 나흘째다. 아침에 일어나자 팔까지 내려온 통증에 정신마져 혼미해져 온다. 주님의 인도와 안위를 기도한다. 통증의 한계점이 어디까지일까! 손가락 끝이 저리며 무감각해진다. 처음 아프기 시작할 때 내일이면 낫겠지 하며 견뎌왔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윌스기념병원에가서 X-Ray와 MRI 촬영 결과 목 디스크 파열이란다. 의사는, 마비가 올 수도 있다며 수술을 권장한다. "선생님, 자연 치유되는 경우는 없나요?" "나는 모르겠는데요. 그런 건 안 배웠어요." 참, 성의 없는 대답에 더는 물을 말이 없다. 그냥 신경주사 3대 맞고 약 처방 받고 귀가했다. 참을 만큼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지만 작년 허리디스크 파열 때도 약물 치료로 치유된 일이 있어 기다리며 내 주님의 ..

내 유년의 10 페이지 중에서

장수읍을 벗어나와 남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금강과 섬진강으로 분수령을 이루는 해발 539m의 수분재가 있다. 그리고 그 옆 산비탈로 하얀 산길이 낙엽송 사이를 돌아가는 게 가보지 않는 곳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마주 오는 차를 비켜서지 못할 정도의 소로를 따라 차를 몰다 보면 길 밑으로 발이 간지러울 정도의 협곡이 굽이굽이 급경사를 이룬다. 한참을 달려 그 길 끝에 가 보면 가지런히 눈에 들어오는 20 여호의 오래된 마을 하나가 큰 산에 에워싸여 요새처럼 박혀있다. 누가 언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을까? 아마 몰락한 딸깍발이 선비나 아님 벼슬이 싫어 낙향한 어느 분이 숨어들어 초야에 묻혀 심신을 달래며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뼈를 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그 풍경을 스케치하며 ..

2020 경칩에~

또 하루가 힘겹게 간다. 사람들은 은둔하고 미물은 동면에서 깨어나는 경칩이다. 봄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산수유 꽃 몽우리를 터뜨리는데 창궐하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온 세계는 어지럽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을 치고,삭막해져가는 사회의 구성원을 무너뜨린다. 이 시대의 봄이 외롭다. 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인간의 오만과 신께 도전하는 무모함에서 오는 지극히 작은 징계라 여겨진다.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돌아 볼 일이다. 먼 훗날 역사는 시대의 오늘을 뭐라 기록할까?

한 장의 흑백 사진

1966년 한 장의 흑백사진 한 가족의 연대기 일부를 읽는 것처럼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의미는 크다. 농업 위주의 시골에서 살자면 노동 집약적 삶으로 인해 삼대가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이 흔하던 우리나라 60년대 가족 친지들의 기념사진이다. 회갑을 맞은 가장은 두루마기 정장과 갓을 쓰고 손주를 안고 있는 모습이 생육하고 번성한 가족 관계 형성의 주된 일로 기록됨이 가장 잘한 일로 여기며 살아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외지로 출가한 딸들과 손주들이 모여든 한 해에 몇 번 없이 따뜻하게 연결된 날은 온 동네가 잔칫날이었다. 가족의 흥망성쇠는 가장의 올바른 가치관과 노동의 신성함에서 비롯된 성실함을 기조로 형성되었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정의 중요성을 알면서 예절이나 언어 교육이 엄격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

복숭아

복숭아 똑똑똑 화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작업하던 여성분이 문을 열자 문 뒤에 숨어 예의 그 수줍은 듯 빙그레 웃는 친구 콧수염이 보인다. 입추도 지나고 말복도 지났지만 폭염이 계속되다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는 오늘, 거센 빗속을 뚫고 성치 못한 몸으로 화실에 온 친구가 반갑기도 하고 안쓰럽다. 얼마나 친구가 그리웠으면 비틀거리며 왔을까! 우산을 가지고도 흠뻑 젖은 그의 어깨와 등이 전철의 냉기에 말라 가는 중이었지만 화실에 도착해서도 젖은 옷의 물기가 선연하다. 손에 사 들고 온 복숭아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돈다. 복숭아와 연관된 나의 이야기 몇 가지가 꼭 슬픔의 언저리를 맴돌게 하는지 모르겠다. 친구 콧수염은 지난 2월에 뇌경색으로 대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다. 화실의 유화 냄새가 좋다며 자주 들..

로또 복권

로또 복권 소순희 이리저리 맞춰봐도 적자일 것 같다. 예상외로 빠져나간 곳이 생기고 나서부턴 도무지 메꿀 방법이 없다. 마침 어젯밤 꿈에 산에 올라 멧돼지를 만났고 돌진해오는 멧돼지에 돌을 던지자 이마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나왔다. "그래, 복권을 사는 거야." 나는 그 길한 꿈 하나를 종일 떠 올리며 하루를 보내고 저녁 시간 문화센터 강의 가면서 복권 판매점을 찾아 다섯 개 붙은 로또복권 한 장을 샀다. 어쩌면 이런 사소한 것에 마음이 든든해지다니 참, 기막힐 일이다. 월요일이니 토요일까지 기다리는 며칠이 은근히 기대가 된다. 내 주위의 어려운 이들을 떠 올리며 조금씩 나눠 줄 생각을 하니 흐뭇한 무엇인가가 나를 사로잡는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흔들리고 불로 소득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나 미안한 마음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