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113

정선에서의 하루

정선에서의 하루 기차는 새벽 3시경에 도착했다. 인적 드문 산골의 선평역 새벽 시간엔 역무원도 없다. 개찰구에 표를 던지고 나오자 낮은 지붕의 집들이 검게 엎드려 있다. 청량리역에서 늦은 밤 강릉행 기차를 타고 증산역(지금은 민둥산역)에서 다시 3량으로 갈아타는 구절리역이 종점인 기차는 밤 별을 머리에 이고 산 골골을 돌아 줄곧 달려왔다. 산골의 11월은 이미 겨울이 들어서고 온 누리가 적막하다. 졸다 깬 눈이 퀭한 사람 몇몇이 내려갈 곳으로 다 간 다음, 눈 붙일 여인숙이래도 찾을 양으로 역사를 나와 골목을 헤매었지만, 나그네가 쉴 곳은 없다. 불 켜진 집 대문을 두드려도 인적은 없고 개 짖는 소리만 마을에 퍼진다. 제자 왕근이와 스케치도 할 겸 사진도 찍어야 하는 하루가 바쁘게 열리는 새벽이다. 다리..

미루나무와 아버지

미루나무와 아버지 내가 태어나기 전 땅 한 평 갖지 못한 아부지는 땅찔레와 자갈이 태반인 척박한 범벌 자갈투성이 땅을 일궈 밭을 만드셨다. 그 곳은 들 패랭이와 할미꽃, 가시 땅찔레가 지천이었고 봄엔 종달새(노고지리)가 머리카락 같은 풀 뿌리를 물어다 동그란 집을 지어 새끼를 길러냈다. 모든 생명가진 가장은 책임 의식과 보호 본능을 기본으로 삼고 가는 것이 본질상 신의 뜻이지 않는가! 아부지가 개간한 물 빠짐이 좋은 모래땅 밭은 거둬 낸 자갈이 자연스레 둑을 만들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자갈을 골라냈을까. 땅이 한 뼘씩 늘어 날 때마다 소금 절인 굴비 같은 아부지의 등과 무딘 손가락 마디는 돌 같이 굳어져도 내 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으랴. 그렇게 아부지는 청춘을 그 땅에 묻으셨다. 봄이오면..

동해두타산 베틀바위

동해 두타산 베틀 바위에 가서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솟은 두타산([頭陀山] 1,353m) 그곳 산중에 은거하는 천혜의 비경이 베틀 바위(550m)이다. 전설을 듣자면 그럴싸하게 포장된 허구인데도 마음은 늘 그렇거니 하면서도 숙연해진다. 두타의 품에 숨겨둔 기암괴석을 어떤 예술가의 작품에 비교할까! 무릉계곡 초입에서 1.5Km의 가파른 산길을 한 시간여의 발품을 파는 사람에게만 허락한 비경임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수만 년 전에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지형이지만 신은 인간에게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의미로 저 웅장한 별천지를 하사하신 모양이다. 두타에서 바라본 청옥산은 그대로 푸르게 능선을 이뤄 흐르고 바위 절벽을 한 줄기로 흐르는 벽계수를 어이 지울 수 있으랴. 1500년..

수학 여행

수학 여행 소순희 나는 아직 경주에 가보지 못했다. 천년고도 경주를 떠올리는 건 여행의 종착지라고 마음에 새겨둔 뜻도 있거니와 진정으로 마음의 눈이 뜨일 때 가 보아야겠다는 신념도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열네 살 중학교 일학년 가을 학교에선 수학 여행을 계획하고 한 달 전부터 담임 김상수 선생님께서 종례 시간이면 누누이 말씀 하셨다. 기억으론 수학여행비가 3만 원이었던 거로 알고 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혼자서 자취를 시작했고 토요일엔 집으로 가서 일손을 돕고 일요일 저녁 막차로 쌀과 김치를 가지고 자취방으로 가곤 했다. 몇 번이고 수학 여행비를 어머니께 이야기할까 망설이다 못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가신지 약 일 년이 되고 일찍 집안 사정을 아는 터라 끝내 그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

어머니와 산수유

어머니와 산수유 3월 24일 휴억에게서 고향 집 뒤꼍에 노랗게 활짝 핀 산수유꽃 사진을 보내왔다. 처마보다 훌쩍 높은 굴뚝 옆에 빈집을 지키며 산수유는 저렇게 잘도 피었구나 문득 마음에 울컥 맺히는 그리움이 꽃처럼 일어 눈물이 핑 돈다. 올봄도 어김없이 꽃 소식이 상경하지만, 이토록 절절한 건 처음이다. 어머니 가신지 6년, 나는 어머니가 뒤안에 산수유나무를 심은 지도 몰랐다. 키 큰 참옻나무와 대봉 감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해 인가 옷 알레르기로 퉁퉁 부은 얼굴과 가려움증으로 된통 힘들어하시더니 베어내고 감나무도 잎만 무성하고 열리지 않아 베어냈다. 그리곤 어머니는 그 자리에 산수유나무를 심으셨나보다. 해마다 3월이면 제일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꽃처럼 자식 소식 기다리셨을 어머니 그립다. 뒤안 장독대 곁..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소순희 "학생, 크리스마스 카드 더 그려 줄 수 없어? 다 팔리고 없어!" 우리는 어제 문방구 아주머니께 20여 장의 카드를 만들어 한 번 판매해 보시라고 전해주고 오늘 들러 보니 더 그려달라 부탁한다. 시내에 있는 작은 문방구는 학교 앞이라 여자 중,고생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곳이다. 문방구 중앙에 있는 난로의 연통을 지탱하기 위해 양쪽으로 잡아맨 철삿줄에 빼꼭이 걸어 뒀는데 하루 만에 다 팔린 것이다. 휴억과 탱자나무집 자취방으로 돌아와 켄트지에 포스타칼라로 밑 색을 칠한 뒤 언덕 위에 교회당과 삭막한 나뭇가지 위에 흰 눈이 쌓인 그림을 그리고 짧은 시를 적어 넣었다. 휴억은 그림을 자르고 붙여서 우리는 카드를 만들었다. 학생으로서는 짭짤한 (?)수익을 올린 45년 전의 일이다. ..

방물장수 할아버지

방물장수 할아버지 소순희 그 방물장수 할아버지가 가위를 짤그랑대며 마을 길을 들어설 때는 겨울 오전쯤이었다. 누나들은 머리핀이나 옷핀을 사기 위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정사각형 빳빳한 종이 위에 원을 그리며 검게 꽂혀있던 머리핀을 사고 가끔은 실타래나 바늘을 사기도 했다. 키가 작은 할아버지가 등에 지고 온 사과 궤짝만 한 곳엔 생필품이며 가락엿이 고작 몇 줄 밀가루 판에 묻혀 있었다. 비싼 거라곤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참 소박한 등짐이 그 할아버지의 전 재산 같았다. 그 겨우내 시베리아의 붉은 융단 같은 모자는 손 집는 부분이 낡아 흰 천이 드러났다. 그 밑으로 늘 엉성한 흰 귀밑머리가 보였고 가끔은 모자를 벗어 땀을 닦곤 했다. 그때마다 달라붙은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유..

우리 아짐

우리 아짐 소순희 아이들의 함성이 도시의 가을 하늘로 풍선처럼 떠 오르고 있었다. 넓은 잎 플라타너스 나무가 투명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운동장 가에는 흰 운동복을 입은 어린아이들이 꼬물꼬물 모여 응원을 하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나는 키 발을 딛고 벽돌 담장 너머로 아이들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의 함성 속에 함께 묻혀 있자니 불현듯 코끝이 찡해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건 내 유년의 소상한 기억 저편으로 폴짝 뛰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 가을 오후는 늘 서늘했다. 운동회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텅 빈 운동장엔 미루나무 긴 그림자가 줄지어 뻗어 있곤 했다. 이 때 쯤이면 출출해졌다. 빨리 집에 가서 삶아놓은 고구마나, 감나무에 달..

씨앗

씨앗 소순희 쌓인 눈이 녹고 찬 바람이 불고 지나간 버스 정류장 철제 울타리를 타고 오른 마르고 비틀린 나팔꽃 덩굴에 동그랗게 달린 통을 만져보니 까만 씨앗이 툭 튀어나온다. 겨울 견디는 씨앗의 눈이 귀여워 여나므개 통을 터뜨려 꽃씨를 받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우연히 만져지는 우둘투둘 단단한 것이 마음 쓰여 꺼내 보니 나팔꽃 씨였다. 봄이 오면 심으려고 종이봉투에 넣어 나팔꽃 씨라고 써 놓았다. 그 작은 것이 잠에서 깨어나는 적합한 필요조건인 햇볕, 온도, 수분을 주면 휴면 상태에서 생장 활동으로 변이가 시작되면서 종피를 뚫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것을 발아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나온 2천 년 전 볍씨에서 싹이 돋았다는 이야기가 보도된 바 있다. 또한 중국 동한 시대 2천 년 전 고묘 에서 ..

그해 여름

그해 여름 소순희 사 학년 여름방학도 거의 끝 무렵에 걸려 있었고 매미 소리에 묻혀 버린 여름 오후를 후텁지근한 기운에 숨이 막힐 듯했다. 이따금 매미 소리가 그칠 때마다 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텃밭의 푸성귀며 돌담을 타고 오른 호박잎이 염천 볕 아래 축 늘어졌다. "아따, 왜 이리 덥다냐 썩을 놈의 날씨가 사람 죽이네! 잉" 마루에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낮잠에 설핏 빠져들면 어머니는 노랗게 콩기름 먹인 부채로 달라붙는 파리를 부채질로 탁탁 쫓아 주셨고, 부채 바람에 비릿한 콩기름 냄새가 났다. 그러다가 어머니도 밀려드는 졸음에 못 이겨 텃밭의 처지는 채소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하루 일과 중 소먹이 꼴을 베는 것이 내게 맡겨진 일이었고 내가 하지 않으면 식구 중 누군가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므로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