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정선에서의 하루

소순희 2022. 11. 8. 21:05

                                        정선에서의 하루

 

기차는 새벽 3시경에 도착했다.

인적 드문 산골의 선평역 새벽 시간엔 역무원도 없다. 개찰구에 표를 던지고 나오자 낮은 지붕의 집들이 검게 엎드려 있다.

청량리역에서 늦은 밤 강릉행 기차를 타고 증산역(지금은 민둥산역)에서 다시 3량으로 갈아타는 구절리역이 종점인 기차는 밤 별을 머리에 이고 산 골골을 돌아 줄곧 달려왔다.

산골의 11월은 이미 겨울이 들어서고 온 누리가 적막하다.

 

졸다 깬 눈이 퀭한 사람 몇몇이 내려갈 곳으로 다 간 다음, 눈 붙일 여인숙이래도 찾을 양으로 역사를 나와 

골목을 헤매었지만, 나그네가 쉴 곳은 없다.

불 켜진 집 대문을 두드려도 인적은 없고 개 짖는 소리만 마을에 퍼진다.

제자 왕근이와 스케치도 할 겸 사진도 찍어야 하는 하루가 바쁘게 열리는 새벽이다.

다리를 건너와 밭 가에 불을 피우고 다섯 시간만 버티면 될 성싶어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허름한 집에서 불이 켜지더니 아저씨 한 분이 나와 마당 가에서 추루루룩 소변을 본다. 잘 됐다 싶어

"저~아저씨, 좀 전에 기차에서 내렸는데 잘 곳이 없어서 그런데요. 어디 묵을 곳이 없을까요?"

"아, 여는 잘 데가 없으요오~"

우리의 처지가 딱했는지 아저씨는 벽을 더듬어가며 따라오란다.

자세히 보니 아저씬 시각장애인이다. 고맙고 반가워서 지폐 몇 장을 쥐어 주었다.

그건 책임을 져 달라는 간절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인도한 곳은 슬라브 지붕의 노인정이다.

문을 두드리자 허연 머리를 한 노인 한 분이 귀찮다는 듯이 현관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확 끼쳐 온다.

"여~ 사람들이 잘 데가 없어서 그러는 모얀데 하룻밤 여서 재~ 주오"

"허~ 회장님 알면 큰일 아이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 노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불을 안고 나와 던지다시피 건네주고 들어간다.

차가운 거실 바닥에 옷도 벗지 않은 채 추위에 떨리는 몸을 뉘이자 이불에서 노인 냄새가 머리 아플 지경으로 난다.

깊은 새벽 내 웅크리고 자서인지 깨어나니 어깨가 아팠다.

노인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담배라도 사 태우세요! 하고 지폐 몇 장을 드렸더니 처음과는 반대로 눈가에 웃음이 번지며 친절해진다

"하~간밤에 춥지않아쏘오?"

"네, 괜찮았습니다. 여기 식당은 있는가요?"

"업으요오~ 저어 가겟집 가면 라멘이라도 끼레 줄란지 모르겄쏘!"

가게에 가서 오래된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바라본 아침 풍경이

냇가에서 피어나는 물안개로 자욱하고 절벽을 이룬 산이 참 아름답다.

산위로 오른 햇볕에 십일월 풍경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냇가를 따라 올라가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파란 줄을 두른 하얀 경찰차가 서더니

경찰 두 명이 가까이 와서 어디서 왔으며, 뭐 하느냐 물으며 신분증을 보잔다.

신분증을 제시하자 요모조모 살피더니 차에 타란다.

직감으로 누군가가 우릴 수상한 사람(간첩)으로 신고했다는 생각이 든다.

경찰서에 끌려가는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났지만, 간첩이 아닌 이상 별일 없겠지 생각했다.

경관은 우릴 태우고 남면 쪽으로 가며 예의 그 사무적인 투로 여러 가지를 묻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하자

"여어 처음 인기래요?"

"네. 이곳 풍경이 참 예쁘네요"

"뭐~ 볼거나 있는 기래요. 저어 가면 좋은디가 있쟎오." 우릴 태우고 산길을 20여 분 남짓 오르더니 

"여~ 겡치가 좋소 ,사진 마이 찍어가오~" 하곤 뒤돌아 가버린다. 

딴에 우릴 좋은 풍경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고 친절을 베푼 곳은 진즉에  폐광이 된 탄좌와 사택 몇 가호가 빈집으로 남아 있는 골짜기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연필 스케치를 하고 터덜터덜 산에서 내려와 처음 자리까진 두어 시간이 족히 걸렸다.

한 20여 년 전이니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생생한 것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  늘 머릿속에 아름답게 각인된 까닭이다.

 

지금도 해가 일찍 떨어지는 11월의 산골은 여전히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림을 계속 그렸음 좋았을 왕근이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보고 싶고 궁굼하기 짝이 없다.

                                                                                                                               소순희2015

 

  

                                                                                              <선평역 앞 낙동마을>

                                                                                                 

                                                                                          <별어곡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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