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밤 풋밤 소순희 고뿔 든 나는 아홉 살 누님 등에 업혀콧물을 발라댔다어린 눈에 들던 밤나무 잎 푸른데비 갠 늦여름 누님은 떨어진 덜 영근 밤송이를 고무신으로 지그시 밟아 밤 톨을 꺼냈다앞니로 풋밤의 껍질을 긁어 벗긴 후 내 입에 넣어주던그 잊히지 않는 풋풋한 기억의 풋밤 그것은 누님의 냄새였다어쩌면 내게 처음으로 냄새라는 것을핏속에 머물게 한 내 다섯 해의 늦 여름이었다 2017 시와 사랑 2026.09.14
폐역에서 폐역에서 소순희 씀바귀 개망초 달맞이꽃 아무렇게나 피고 지는 폐역의 녹슨 선로에 늦여름 햇살 감겨 오는 한때 온기 사라진 작별의 날이 몇 해를 넘기고 말았다 지나간 시간 붙드는 쑥대, 함께 가자고 연신 발목을 잡는데 여기 저기 피어난 늦꽃들 기다림처럼 흔들린다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한 세월가고 그리움은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채 놓아주지 않는다 가로 누인 침목이 삭은 뼈처럼 풀 섶에 묻혀 다시 봄을 맞아 풀꽃 피어도 잊힌 날들은 오지 않아 겉 뿌리가 서로를 붙드는 폐역에서 붉어가는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2024 시와 사랑 2026.09.03
문득 문득 소순희 낮닭 울음에 사과꽃 지는 소하리 산 밑 마을에서 봄 한 폭 그려 넣는 한나절 새털구름 하늘 깊이 박힌다 멀리서 산꿩 소리 들릴 때 문득, 소하리에 살다 시집간 제자 얼굴이 떠올랐다 사과꽃처럼 해맑던 민아 2014 시와 사랑 2026.08.24
여름 저녁 여름 저녁 소순희 유리창 안에 갇힌 수컷 방아깨비 한 마리입가에 풀 물 토해낸 흔적 갇힘의 애탐이라가엾어 놓아 주려고 문밖 공중으로 던지자날개 펴 포르르 나는데 느닷없이 날아와 채가는참새 한 마리, 여름 저녁 무렵 자연계의 일이다 2023 소순희 시인의 여름 저녁은 짧지만 강렬한 서사와 깊은 여운을 남기는훌륭한 작품이다. 1.극적인 반전과 선명한 이미지이 시는 단 몇 줄만으로 완벽한 기승전결을 보여준다.ㅇ전반부-유리창에 갇혀 풀 물을 토해내는 방아깨비를 보며 연민을 느끼는 인간의 따뜻한 시선이 그려진다.ㅇ후반부-자유를 찾아 공중으로 던져.. 시와 사랑 2026.08.12
인연 인연 소순희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하지 마시라한때 이승의 인연 깊어 너와 나바라보지 않았더냐마음 열고 보면 바람 같은 전언도한 세상의 마디였거늘가버린 것들의 뒷모습에 대하여쓰다만 일기에 덧붙인그 무엇으로 그 허공 같은 마음 달래랴사는 일 다 그런 것이라고순간을 놓쳐버린그 인연의 내면에 다가서서 보는쓴 약 들이키는 아침 2026 시와 사랑 2026.08.03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다 소순희칠월 둘째 주부터매미가 울기 시작했다나는 왜 너를 잊지 못하나오뉴월 볕바른 길이 먹먹하다한 무더기 여름꽃 시들고숲속마저 느긋하다가슴팍에 간직한 청음의 기관공명의 절창으로그 오랜 잠을 깨워다오중생대 백악기 시절도굽이치는 사랑 있었으리먼 조상의 겹눈으로 그 뜻 보내오니다시금 받아다오이마에 흐르는 그리움으로한여름이 익고 있구나 2026소순희 시인의 는 한여름 울려 퍼지는 매미 소리를 매개로, 까마득한 태고의 시간.. 시와 사랑 2026.07.27
이색적 광경 이색적 광경 소순희지하철임산부 위해 비워둔자리가 있다그 자리에 떡하니 올라앉은 여행용 가방그 옆자리엔 중년 남성이 앉아 간다그러고 보니모시고 가는 가방이불룩한 게 임신했나 보다 2026 시와 사랑 2026.07.19
고향에 가서 고향에 가서 소순희오랜만에 만난 고향 아재너, 그림 그린다며? 밥벌이나 하냐?기술이나 배우제...물질만능주의처럼 섬뜩한 말고향에 가서 나는 한 마리 벌레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992 소순희 시인의 1992는 고향이라는 푸근한 공간에서 마주한현실의 냉혹함과 예술가의 고뇌를 아주 직관적이고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이다.1. 고향이라는 공간의 배반전통적인 문학에서 고향은 대개 따뜻하고, 안식을 주며, 어머니의 품 같은 공간으로 표현된다.하지만 이 시에서의 고향은 도리어 주인공에게 상처를 준 곳으로 묘사된다.오랜만에 만난 고향 아재의 자기 본위적 질문은 주인공이 기대했을지 모를고향의 .. 시와 사랑 2026.07.12
제33회 미술단체 예형회 정기전 미완성 그림 소순희지금 남은 여백을 그리다 만 그림이라고 남들은 쉬이 말하지나는 내 삶을 덧칠하며 무수히 많은 시간을 덮어버렸지그렇게 쌓인 허다한 색채로별일 아닌 듯 묵은 세월만 쌓여겉모습 고운 시간 속에 깃든후락 朽落 의 일들은 안개 같네덧없음이 드러나는 이순의 끝쯤 해체된 내 오장육부의 더러움도 보이네보이지 않는 것까지 떨어내는 죄의 명멸,헛된 꿈마저 비린 시간철없던 때로 돌아가 환했으면 좋겠네 그리곤 절제와 생략으로 한 점 그림 완성해 보고 싶네 2025 그림이야기(캔바스 위의 날들) 2026.07.04
그 늦봄의 일 그 늦봄의 일 소순희 늙은 밤나무는 제 겨드랑이가 썩어 내려앉은 구멍을 박새에게 내주었다 다시는 물 오르지 못한 삭신의 골다공증 같은 빈 곳에서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 용케도 입 먼저 벌려 어둠 깊은 봄을 받아먹었다 도처에 그들을 노리는 눈들이 송곳처럼 꽂히는데, 어미는 새끼들 먹이느라 이 숲 저 숲으로 바쁘다 햇볕 찬란한 어느 날, 날렵한 살쾡이의 뒷모습이 휙 풀숲으로 사라진 뒤 어미의 가느다란 굽은 발과 깃털 몇개가 밤나무 그늘에 쓸쓸히 남은 늦봄 살 비듬 일던 새끼들 영문 모르고 빈 뱃속 드러낸 채 가물가물 허물어.. 시와 사랑 2026.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