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원에서 장호원에서 소순희쓸쓸히 등 돌렸던 가을 사람도이 길을 걸었을까요절한 그도 복사꽃 아래마음 설렌 적 있었을까장호원에선물 올리는 복숭아나무 가지마다눈 트는 소리 듣노니상춘지절 초목도 덩달아 숨소리 은밀하다 산 굽이 하나 돌면 분홍빛 몸 푸는 언덕마다 다시 분홍빛 두근거리는 무릉도원 봄날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꽃 피워도나 어떡하라고 환장할.. 시와 사랑 2024.04.21
제라늄 제라늄 소순희 누이야, 너에게도 꽃바람일던 하루가 있었니? 몇 해 전 화원에서 건조한 내 마음 밭에 무슨 바람 불어 쉬이 저무는 봄 같이 흔한 화초를 사 왔다 그해 가을까지 그냥, 마음이 꽃구름처럼 풀어져 영문 모르게 가을도 지고 잠 못 드는 밤 별도 하나둘 지고 차츰, 목마른 화초가 잊혀질 무렵 바람 탱글탱글한 지독한 겨울 속에서도 너의 입술 같은 붉은 꽃 피워낸 날들이 대견하다 누이야, 세상의 모든 것들에 눈감으면 어지럽고, 마음 뜨면 외로워진다 불면의 밤은 다시 오지 말고 사계의 마디마다 꽃 피워주기를 봄 편지로 쓴다 2023 시와 사랑 2024.04.14
4월의 기약 4월의 기약 소순희 그대여, 진달래 피면 돌아오라 풍문으로 듣는 것은 헛된 것이어서 4월의 일들은 모를 일이다 묵묵부답인 저 산 푸르름에도 한사코 그대 이름자 깃드노니 도처에 붉은 메아리로 숨어 허물 많은 내게 부끄러운 기약도 한갓 되돌아오는 답신이었던가 하루해 길어지면서 보고픈 게 더 늘어가 진달래 피는 것도 죄가 된다면 이적지, 피고 지는 꽃들은 그대로 인한 죄 가린 그늘막이었더냐 물 오른 버드나무 꺽어 불어주던 호드기 소리 듣고 싶구나 그리하여 늦 뱀의 잠 깨우는 4월에는 그대여, 모든 길 트인 봄 날로 돌아오라 2024 시와 사랑 2024.04.05
목련꽃 전쟁 목련꽃 전쟁 소순희 선전포고하는 4월에는 내 어찌 마음에 무장을 하지 않으랴 하늘에 고하는 저 묵언의 숭고함 목련 화살촉은 일제히 임전 태세다 곧 동남풍이 불어오면 활시위를 당겨 하얗게 허공을 뒤덮는 눈홀림으로 죽기를 각오한 십만 대군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꽃 피우는 일이다 봄은 꽃 전쟁이다 시와 사랑 2024.03.31
그녀의 일 그녀의 일 소순희 꽃을 보려면 한 번쯤 몸살을 앓아야 한다는 궤변을 나는 봄맞이라고 생각했다 겨우내 적조한 그녀와 나 사이 노심초사 칼바람 속 웅크린 저 무량한 속내를 봄이 온다고 열 수 있으랴 꽃이 핀다고 어찌 쉬이 피어나겠는가 속으로 감춰온 눈물과 소진한 진액의 결정으로 견뎌온 삼동의 끝에서 눈 뜨는 기적의 반란, 그리하여 꽃은 빛깔과 향기로 개화한다 2024 시와 사랑 2024.03.21
도원을 떠나며 도원을 떠나며 소순희 너 없어 도원을 떠난다 신세계 2악장을 들으며 돌아서던 좁은 골목의 눈길 멎는 곳 이제는 빈집 같아 잃어버린 한쪽 추억이 봄비에 젖는다 그날의 푸른 잎 다시 돋아 오는데 낮은음으로 불러주던 노래 들을 수 없고 지워지지 않는 스물셋 돌아보며 도원을 떠난다. 시와 사랑 2024.03.14
빚쟁이 빚쟁이 소순희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 아무 빚도 지지 말라 하신 주님 말씀 명심하며 참, 잘 견뎌 왔습니다 아름아름 건너온 징검다리 같은 생의 후반 그사이 빚을 많이 졌습니다 오래 묵은 사랑의 흔적이 남긴 마음 자락도 골이 깊어 자꾸만 빚만 늘어갑니다 실핏줄까지 전해오는 이 무량한 사랑이 천둥벌거숭이 나를 키워온 그 사랑 빚 언제 갚을지 몰라 새기고 새겨 부실한 내 영육 간에 낙인을 찍고도 도도히 흐르는 세월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2023 시와 사랑 2024.03.09
파미르고원을 꿈꾸며 파미르고원을 꿈꾸며 소순희 내 생에 한 번쯤 파미르고원 유목의 날을 은둔의 첩경으로 한 달포 지내보고 싶네 만년설 배경의 눈 시린 풍경과 숨 막히도록 트인 구릉에서 잡힐 것 하나 없는 멈춘 시간의 망아지 울음을 듣는 날은 초원 문명도 헛된 기억이되리 별자리 스치고 지나가는 유성도 더 찬란할 거고, 포플러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도 더 푸를 거니 나, 거기 파미르고원에 은둔한 유목의 날은 생의 일부가 참, 깨끗해지겠네 2024 시와 사랑 2024.02.15
제재소에서 제재소에서 소순희 악산 능선 같은 회전 톱날에서 그가 켠 나무 향이 났다 보지 않고도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는 건 등고선처럼 그어진 속살에서 고유의 화인으로 내보내는 향 때문이다 무엇이 되어 만날지 모르는 나무는 절명의 순간을 그 산, 그 흙, 닮은 근원으로 회귀하는 맞물린 결집이다 쌓인 톱밥만큼 눕는 묵묵한 입 닫음도 가장 아리게 해체된 마음자리다 어머님을 보내고 돌아오던 길엔 언제나 제재소 옆길로 돌아왔다 등 뒤에 숨긴 문란한 생각이 행여 나를 칠까 도시 외곽 제재소 톱 소리로 잘라내며 걷노니 나무 향이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2016 시와 사랑 2024.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