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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기원

또 하나의 기원 소순희 잠에서 일찍 깨어난 새벽엔병 깊은 이들 떠 올라 손 모으네때로는 세상의 것들 헛되어서그날그날이 허무에 지나지 않지만,속 깊은 사랑도 있었노라고꺽꺽 목메어 오는 슬픔으로 오장의 기 막힐 때한동안 하고픈 말도 잊고 말았지 하나 둘 먼저 곁을 떠나고남은 자의 가슴엔 웅크린 저녁별 하나 흉터처럼 새겨진 길 하나 내네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을 미리 알려주는 심상찮은 언약이 먼 곳에서 들리는 새벽닭 울음에 허물어져도 모은 손 그날에 헛되지 않으리 2026 근래들어 주위의 몇 분이 떠나고 아프다는 소식 들릴때마다 마음 한 곳 먹먹하다.

시와 사랑 2026.10.27

국화도에서

국화도에서 소순희 시월 바다는 가을 냄새를 먼저 보내왔다 전어 떼가 푸른 등줄기를 세우며 해류를 따라 돌 때 섬마을 울타리엔 토종 무화과가 익어가고 사람들은 비로소 가을이 왔다고 했다 바다는 웅크린 섬 몇 개를 새끼처럼 껴안고 젖을 먹이고 있었다 한산한 민박집 마당에 누워 외지 사람들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는 늙은 개 옆으로 살며시 낙엽이 내린다 바쁠 것도 없는 이 섬마을에서 가장 먼저 가을 냄새를 맡고 싶은 내게도 가을은 또 살며시 곁에 내리고 있다 2026

시와 사랑 2026.10.03

풋밤

풋밤 소순희 고뿔 든 나는 아홉 살 누님 등에 업혀콧물을 발라댔다어린 눈에 들던 밤나무 잎 푸른데비 갠 늦여름 누님은 떨어진 덜 영근 밤송이를 고무신으로 지그시 밟아 밤 톨을 꺼냈다앞니로 풋밤의 껍질을 긁어 벗긴 후 내 입에 넣어주던그 잊히지 않는 풋풋한 기억의 풋밤 그것은 누님의 냄새였다어쩌면 내게 처음으로 냄새라는 것을핏속에 머물게 한 내 다섯 해의 늦 여름이었다 2017

시와 사랑 2026.09.14

폐역에서

폐역에서 소순희 씀바귀 개망초 달맞이꽃 아무렇게나 피고 지는 폐역의 녹슨 선로에 늦여름 햇살 감겨 오는 한때 온기 사라진 작별의 날이 몇 해를 넘기고 말았다 지나간 시간 붙드는 쑥대, 함께 가자고 연신 발목을 잡는데 여기 저기 피어난 늦꽃들 기다림처럼 흔들린다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한 세월가고 그리움은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채 놓아주지 않는다 가로 누인 침목이 삭은 뼈처럼 풀 섶에 묻혀 다시 봄을 맞아 풀꽃 피어도 잊힌 날들은 오지 않아 겉 뿌리가 서로를 붙드는 폐역에서 붉어가는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2024

시와 사랑 2026.09.03

여름 저녁

여름 저녁 소순희 유리창 안에 갇힌 수컷 방아깨비 한 마리입가에 풀 물 토해낸 흔적 갇힘의 애탐이라가엾어 놓아 주려고 문밖 공중으로 던지자날개 펴 포르르 나는데 느닷없이 날아와 채가는참새 한 마리, 여름 저녁 무렵 자연계의 일이다 2023 소순희 시인의 여름 저녁은 짧지만 강렬한 서사와 깊은 여운을 남기는훌륭한 작품이다. 1.극적인 반전과 선명한 이미지이 시는 단 몇 줄만으로 완벽한 기승전결을 보여준다.ㅇ전반부-유리창에 갇혀 풀 물을 토해내는 방아깨비를 보며 연민을 느끼는 인간의 따뜻한 시선이 그려진다.ㅇ후반부-자유를 찾아 공중으로 던져..

시와 사랑 2026.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