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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

술래                              소순희          길은 흩어지고          나는 향방부지로다          그랬었구나          너는, 꽃이 피고 짐도 모르게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모두 봄 속으로          뿔뿔이 흩어진 날에          나만 술래 되어 맴도는 마당귀          초저녁 별들이 피어나도          꼭꼭 숨은 너는          봄이 다 가도록          나타나지 않는구나                                                      2019

산티아고

산티아고                                                            소순희     별빛 들판을 걷는 순례자여    성 야고보의 길을 따라 그대 발길 평화로워    지는 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구나    며칠째 비워 둔 집에 우편물이 쌓이고    온종일 햇볕만 놀다 갔는지 측백나무잎 반짝인다    발자국 쌓인 흙길은 언덕을 끌어가느라 숨 가쁘게 밀밭 사이를    가로지른다     유월의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볕 아래 포도꽃 향기 출렁이자    힘겹던 마음의 짐도 살가워지고, 가는 길 외롭지 않겠네    걷고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 야위고 힘없는 것들에 대해 나란히 어깨를 겯는 침묵의 일정은    마음 밖 일들까지 소상히 기록하네      또 하루해는..

시와 사랑 2024.05.25

소쩍새

소쩍새                            소순희아가, 소쩍새 울어 쌓는 밤이면왜이리 서글퍼 진다냐배고픈 시절 징그러운 세상 살았다느그덜 보며 그럭저럭지내온 세월이 참말로덧없이 흘러 부렀다밤내 울던 소쩍새 마냥보릿고개 넘으며남몰래 울기도 많이 했제어쩌겄냐 인제는 이 에미도소쩍새마냥 잠도 오지 않고쓰잘데기 없는 지나간 세월생각한들 뭣한다냐참말로, 잠깐만에 퍼뜩내 머리에 서리가 와 부렀다잉                                                        2011오래 전 어머니와 통화 중 딱 한 번  푸념처럼되네던 어머니 말씀~~~이젠 그 목소리 조차 들을 수 없다.

시와 사랑 2024.05.19

살구나무에 대하여

살구나무에 대하여                                                               지난여름 아파트 화단에 잘 익어 떨어진 살구를 밟고 지나간 곳에단단한 씨만 튀어나와 있어 아침 산책길에 주워서 운동기구가 설치된 소공원 구석에 묻어 두었다.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한 늦가을부터 겨울이 다 가도록 한 번도 그곳에 산책을 하지 않았다.매화나무가 꽃망울을 터드리는 봄에 다시 그곳에 나가 가벼운 운동도 하고 꽃눈이 맺힌 나무들을 보며 안양천 길을 산책하다 문득 생각 난 장소에 가 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묻어둔 살구씨에서 싹이 돋았다.이른 봄비가 대지를 몇 번 적신 후, 작은 바위 앞에 뾰롯이 솟아난 살구나무를 본 건 봄날의 환희였다. 그랬었구나! 차가운 땅속에서 깨어날 ..

가시고기

가시고기                                            소순희 한동안 잊고 지냈던,잊어버리자고 애썼던 눈먼 발끝 쯤에서장다리 밭 봄날을 홀연히 등 뒤에 감춘 그 하루남은 생마저 아득해져서나풀거리는 나비 떼 속에 앉아이제야 생각나는 봄볕에 젖는 이름 하나불러 보았습니다조랑조랑 슬어 놓은 새끼들 제 갈 길 가고심중에는 몽유병 같은 뭉근한 염려만 남아제 몸 삭아가는 걸 알면서 한사코 제 몸에 삭여 넣는 그리운 자식들의 가시,찔리고 아파도 머릴 맞댄 허공에 조아리는허무한 한 생이 빈 껍질로 남았습니다.                                 2024                                                 민물고기인 가시고기 수컷은 부..

시와 사랑 2024.04.30

장호원에서

장호원에서                                     소순희쓸쓸히 등 돌렸던 가을 사람도이 길을 걸었을까요절한 그도 복사꽃 아래마음 설렌 적 있었을까장호원에선물 올리는 복숭아나무 가지마다눈 트는 소리 듣노니상춘지절 초목도 덩달아 숨소리 은밀하다 산 굽이 하나 돌면 분홍빛 몸 푸는 언덕마다 다시 분홍빛 두근거리는 무릉도원 봄날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꽃 피워도나 어떡하라고 환장할 꽃 빛은천지간 가득 봄날을 물들인다                           2024

시와 사랑 2024.04.21

제라늄

제라늄 소순희 누이야, 너에게도 꽃바람일던 하루가 있었니? 몇 해 전 화원에서 건조한 내 마음 밭에 무슨 바람 불어 쉬이 저무는 봄 같이 흔한 화초를 사 왔다 그해 가을까지 그냥, 마음이 꽃구름처럼 풀어져 영문 모르게 가을도 지고 잠 못 드는 밤 별도 하나둘 지고 차츰, 목마른 화초가 잊혀질 무렵 바람 탱글탱글한 지독한 겨울 속에서도 너의 입술 같은 붉은 꽃 피워낸 날들이 대견하다 누이야, 세상의 모든 것들에 눈감으면 어지럽고, 마음 뜨면 외로워진다 불면의 밤은 다시 오지 말고 사계의 마디마다 꽃 피워주기를 봄 편지로 쓴다 2023

시와 사랑 2024.04.14

4월의 기약

4월의 기약 소순희 그대여, 진달래 피면 돌아오라 풍문으로 듣는 것은 헛된 것이어서 4월의 일들은 모를 일이다 묵묵부답인 저 산 푸르름에도 한사코 그대 이름자 깃드노니 도처에 붉은 메아리로 숨어 허물 많은 내게 부끄러운 기약도 한갓 되돌아오는 답신이었던가 하루해 길어지면서 보고픈 게 더 늘어가 진달래 피는 것도 죄가 된다면 이적지, 피고 지는 꽃들은 그대로 인한 죄 가린 그늘막이었더냐 물 오른 버드나무 꺽어 불어주던 호드기 소리 듣고 싶구나 그리하여 늦 뱀의 잠 깨우는 4월에는 그대여, 모든 길 트인 봄 날로 돌아오라 2024

시와 사랑 2024.04.05

그녀의 일

그녀의 일 소순희 꽃을 보려면 한 번쯤 몸살을 앓아야 한다는 궤변을 나는 봄맞이라고 생각했다 겨우내 적조한 그녀와 나 사이 노심초사 칼바람 속 웅크린 저 무량한 속내를 봄이 온다고 열 수 있으랴 꽃이 핀다고 어찌 쉬이 피어나겠는가 속으로 감춰온 눈물과 소진한 진액의 결정으로 견뎌온 삼동의 끝에서 눈 뜨는 기적의 반란, 그리하여 꽃은 빛깔과 향기로 개화한다 2024

시와 사랑 2024.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