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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글씨

감꽃 글씨 소순희 고향 집 흰 회벽에 연필로 쓴 세로글씨가 막 돋는 아기의 젖니처럼 고왔다 염소 새끼 난 날과 감꽃이 피었다는 날을 가지런히 적어 놓았던 소 학교도 못 다닌 아버지 마흔의 봄날이 거기 피어 있었다 어깨너머로 흘러든 노을 진 하늘로 번지는 감꽃 같은 글씨 하나둘 깨치며 기뻤을 아버지 무딘 손가락 오그려 쥔 손에 아버지의 푸른 날이 획마다 곱게 배어 있었다 2019

시와 사랑 2023.08.12

내 친구

내 친구 소순희 순희야, 지금 바로 하늘 한번 봐주라. 깊은 밤 내게 메시지가 들어왔다 창가에 나가 올려다본 하늘 구름을 비켜난 달이 음력 유월 보름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이 새벽의 아름다운 전율 누구랴 내게 이 선물을 보내주겠는가 나, 이처럼 충만한 밤은 잠 못 이룬들 무엇이 헛될까 음력 열 닷새 허공에 뜬 달에 쏘아 올린 마음 맑은 그대, 내 친구 용재의 시선이 휘영청 맑구나 2023

시와 사랑 2023.08.05

쥐 소순희 "아. 그 잿더미에서 불이 붙은 거 아녀?" "몰라 아척에 재에다가 물 뿌리고 갔다 놓았당께" 용식이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죄인처럼 조아렸다. 타다 남은 헛간 기둥과 서까래가 숯덩이로 검게 남아 있는데 실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아, 글쎄 안채에 엥겨 붙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먼" 땀이 흐른 어른들 얼굴엔 불을 끄느라 검은 검댕이 묻은 코끝과 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쪽에선 쇠스랑으로 초가지붕을 찍어 걷어 내고 물을 비워 낸 바케스가 휙휙 마당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여섯 명의 어른들이 타오르는 불길을 간신히 잡았다. 용식이네 마당 북쪽으로 지어진 헛간이 반 이상 타 버렸다. 이젠 안심이란 듯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마을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겨울 노을이 스러지고 있었다. 눈이 녹을 ..

막장에 대한 예의

막장에 대한 예의 소순희 화절령 운탄고도를 진폐증 앓던 제무시가 그르렁대며 넘었다 고생대 칠흑의 어둠을 두더지처럼 먹고 산 막장의 선산부 김형 더는 물러설 벼랑도 없다고 선택한 지하 몇백 미터 저승에서 뼈 갈아 숨 가쁘게 벌어 온 돈으로 이승의 생을 꾸려가던 살가운 가족의 웃음 소리마저 검은, 갱도 나무 기둥에 화석으로 새겨 놓은 오늘도 무사히 라는 말 얼마나 절실했으면 퇴적층이 된 아버지의 하늘과 젖 물리지 못한 어머니의 땅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막장의 삶도 더운 피가 흘렀더니라 낙엽처럼 사윈 그해 가을 소금기 절은 갱도 벽에 긁어 파낸 뜨거운 글씨 오늘도 무사히! 안전모의 불빛에 맥없이 흐렸다 2023 화절령~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과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인 백운산 자락의 고개이다. 근처 탄광에서 채탄 ..

시와 사랑 2023.07.16

별이 지는 쪽으로

별이 지는 쪽으로 소순희 별이 지는 서쪽으로 가다 내 껍질 속 나도 망초꽃 무성한 길을 걷고 있음을 보았다 한낮을 지나온 이순저수지 해거름 놓인 발자국 자취 없는 흙냄새 피어 길을 가다 멈춰서서 바라보는 노을 길은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아직은 여름꽃 지지 않아 푸른 기다림인 양 물새들 날고 잠긴 물은 무슨 꿈이 있어 퍼내도, 퍼내도 산 그림자 담아 내느냐 별이 지는 서쪽은 내 영혼의 잠 터 은밀히 풍경 속에 물들어 가는 2022

시와 사랑 2023.07.12

운동화 도둑

운동화 도둑 소순희 종례를 마치고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급우들 뒤로 엇비쳐드는 서녘 햇살 줄기 속에 뽀얀 먼지가 떠다닌다. 복도 한쪽 벽 붙박이 신발장엔 한 켤레의 신발도 남지 않았다. 나는 순간 아찔하다. 이 주일 전에 새로 산 내 운동화가 있어야 할 41번 자리에 없다. 몇 번이고 교실을 돌아보고 신발장을 기웃거려 봐도 칸칸이 비어 있다. 울컥 목울대까지 치켜드는 상실감에 막 눈물이 나며, 어머니 얼굴이 오버랩 된다. 검정 운동화 한 켤레로 한 학기를 버텨온 터라 닳아빠진 발바닥 밑에 밟히는 작은 돌의 촉감과 수없이 빨아 희끄무레 색 바랜 운동화의 앞머리 부분과 너덜거리는 뒤꿈치, 그리고 끈을 꿰는 눈이 두어 개 빠진 낡은 운동화를 어머니께 보이며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어렵사리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소순희 돌아서는 등 뒤로 한 번도 내어주지 않던 노을이 피었습니다 밤꽃 환한 유월 저녁도 서둘러 그림자를 지우고 산은 더 검푸르게 제자리로 돌아가 웅크립니다 그대 사랑한 만큼 하루해도 짧아 저녁 새 몇 마리 어스름 가르며 대숲으로 숨어들 듯 사랑도 한갓 하루 일 같아 기막힌 저녁놀 빛 속으로 숨어듭니다 본디 사랑함에 있어 숙맥인지라 애써 태연한 척 어두워져 가는 밤꽃 숲을 바라보았습니다 쉬이 눈을 거둘 일 아닌 풍경 속에서 자꾸만 주먹으로 닦는 눈물이 막차의 불빛에 빨려들고 있었습니다

시와 사랑 2023.06.13

사랑과 미움

사랑과 미움 소순희 초등학교 2학년 그해 가을까지 나는 한글을 읽지 못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고도 오랜 뒤, 밤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어느 밤부터 나는 이웃 선예네 마실 가는 큰 누나를 따라가 숙제로 내어 준 국어책 한 단원을 몇 번이고 따라 읽으며 차츰 한글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국어 시간에 담임 성낙형 선생님께서 그 단원을 펴시며 읽어 볼 사람? 하신다. 나는 슬며시 손을 들었고 한글을 읽지 못한 나를 놓칠 리 없는 선생님은 "순희 읽어봐!" 하신다. 어젯밤 늦도록 외우다시피 한 글을 읽기 시작 했고 한글을 읽지 못한 애가 줄줄 읽어 내려가자 선생님과 반 애들은 의아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리라. 다 읽자, 선생님은 그윽한 눈빛으로 "자 박수!" 하며 먼저..

가장(家長)

가장 (家長) 소순희 집으로 가는 굽은 언덕길은 늙은 플라타너스가 어느 가장의 마른 정강이처럼 희었다 발길질에 덧난 상처가 채 아물기도 눈도 귀도 상처투성이다 별일 아니라고 나무에 기대어 입속말로 달래는 한 잔 취기가 이렇게나 눈물겨울까 한 세상 머물 조립된 도시의 집들 그곳에 숨죽여 가며 자식을 길러내는 이 장엄한 삶 앞에 고개 숙인 아비들 위태로운 칼날 같은 하루를 딛고 간다 2004.소순희 누가 이 무변광야 같은 한 시대를 흔들리지 않고 살아 낼 수 있을까. 오늘의 가장들은 외롭다. 고독한 메신저, 힘내시라! 한 잔 술에 반은 눈물이라하지 않던가. 어뗳든 가족을 품는 울타리로 서 있는 한, 또 그곁에 같이 서는 누군가 있지 않은가!

시와 사랑 2023.05.29

박준지 선생님

박준지 선생님 소순희 2016 사 학년 여름방학 끝 무렵이었지 싶다. 나는 까맣게 탄 얼굴에 윗옷은 엷은 포플린 남방셔츠 하나 걸친 것 아니면 거의 벗고 사는 터라 흙빛 등은 어깨뼈가 유난히 드러났고 갈빗대가 드러난 가슴엔 간혹 하얗게 손톱자국이 줄을 긋곤 했다. 그날도 돌담을 끼고 돌아가는 산밑 길로 나뭇잎 무늬가 그려진 반소매 남방셔츠를 벗어 휘휘 돌리며 지름길인 순구 형네 밭둑을 지나 용식이네 집으로 마실을 가고 있었다. 방죽골로 접어드는 초입엔 오래된 류 씨 집안 제각을 관리하는 용식이네 집이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 고즈넉이 누워 있었다. 막 밭둑을 내려와 길 가장자리로 몇 걸음 후루룩 내려오는데 나는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그곳 탱자나무 그늘에 그토록 보고팠던 선생님이 나를 보며 웃고 서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