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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박구리의 겨울

직박구리의 겨울 사과 한 쪽이 상처가 나고 짙은 갈색으로 변해가자 아내는 버리려고 골라 두었다. 장수 누님이 보내준 사과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깝지만 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 주변을 둘러싼 과수원이 붉은 열매를 내보이는 늦가을엔 풍요로움에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누님의 밭 가에도 사과나무 몇 그루가 해마다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그중 잘 익은 사과를 보내 준 누님의 열일곱 살 적 붉은 볼이 떠 올랐다. 겨울은 새들에게도 시련의 계절이다. 인가 가까이 날아든 배고픈 조수들의 먹이 찾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사과를 집어 들고 출근하며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소나무 가지 사이에 사과를 올려 두었다. 다음 날 아침 눈아래 뺨에 갈색 무늬와 회색의 가슴팍에 하얀 점이 박힌 까만 눈의 직박구리가 사과..

겨울 나무에 대한 명상

겨울 나무에 대한 명상 소순희 어제는 산에 가서 겨울잠에 취한 나무들을 보았다 찬란함도 한때 이거늘 서늘함에 몸 뉜 맹아의 가지 끝 건조한 하늘로 삐릭삐릭 삐이익 의문의 문장을 송신하는 산새 한 마리 머물다 간다 뒤숭숭한 꿈을 꾸는지 골짜기마다 나무들, 막 젖 뗀 유아의 잠꼬대처럼 흔들림이 애처롭다 산 어디에나 슬어 놓은 새끼들 숨소리마저 막막한 겨울 한 철 던져진 곳 척박한 생의 목마름으로도 뿌리 박고 어깨 겯는 동거가 살아 간다는 이유로 성스럽다 나이테를 좁혀가며 맨몸으로 견디는 고락에도 아름다운 속내의 현실이 드러나는 이 숭고한 의식을 외면할 순 없지 않는가 2021

시와 사랑 2023.01.01

십이월의 눈

십이월의 눈 소순희 홀연히 떠나는 섣달의 그 밤 내 기억 속에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그 길이 어둔 밤길일지언정 가야 할 길은 열려있구나 침엽 낙엽수 가지에 걸린 하현의 쪽 달 어슴푸른 하늘길로 날개짓 하는 호접의 혼처럼 그대 설익은 한 그릇 사랑이 뭇 연인의 꿈이었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지어다 사랑했노라고 입속말로 거두는 지상의 슬픈 언어로 덮는 십이월의 눈, 눈

시와 사랑 2022.12.18

제 84회 목우회 회원전

장소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쟈2,3,4층 1층 목우회 무아프 부스전 기간 : 2022,12,14(수)~19(월) 남원에서 장수 방면으로 19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우측으로 산동면에 속한 작은 산마을이 숲속에 묻혀있다. 돌(전북 방언으로 독)이 많아 독골이라 부르는 산마을은 욕심도 권력도 탐하지 않는 여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마을이다. 돌담 위에 지은 저 집도 사라져가는 풍경의 일부이다.

제35회 대한민국회화제 정기전

제35회 대한민국회화제 정기전-근현대 회화로 대전환- 장소 : 인사동 라메르 갤러리 1층(3관) 2층(4,5관) 기간 :2022.12.7(수)~12(월) 삶의 고단함도 라일락 핀 봄밤엔 안식처럼 덮여오던 라알락향으로 평안을 얻어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빛 바래고 낡은 붉은 기와집을 둘러친 돌담과 몇 그루 울타리에 핀 라일락과 복사꽃과 늦게 잎을 피운 감나무와 온 밤을 울던 소쩍새 소리는 차츰 사라져가는 서정의 한 부분이다. 그림으로 기록한들 그때 그 풍경을 대신 할 수 있을까!

청령포에 가거든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맘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금부도사 왕방연- 단종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는 관음송(수령600년 높이30m 둘레5.10)> 청령포에 가거든 소순희 그대에게 남은 마지막 말 한마디도 녹취하지 말라 진실은 언제나 떠난 뒤에 밝혀지는 법 외면의 여름날은 그대 두고 멀어지는가 주군의 예감은 필정이었으리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눈물로 봉인된 치욕의 계절도 석양에 물들어 한갓 욕된 일기에 불과하니 기록한들 무엇하랴 송림 사이로 뻗는 억지 죄 길은 어디까지가 의문인가 유배지 청령포에 가거든 그대 산 넘고 물길 멀어도 서강 흐름에 옛것 아님을 서러워 마라 홑 것 빈 껍질만 물가에 남더라도 남은 마음 한 자락..

시와 사랑 2022.11.24

정선에서의 하루

정선에서의 하루 기차는 새벽 3시경에 도착했다. 인적 드문 산골의 선평역 새벽 시간엔 역무원도 없다. 개찰구에 표를 던지고 나오자 낮은 지붕의 집들이 검게 엎드려 있다. 청량리역에서 늦은 밤 강릉행 기차를 타고 증산역(지금은 민둥산역)에서 다시 3량으로 갈아타는 구절리역이 종점인 기차는 밤 별을 머리에 이고 산 골골을 돌아 줄곧 달려왔다. 산골의 11월은 이미 겨울이 들어서고 온 누리가 적막하다. 졸다 깬 눈이 퀭한 사람 몇몇이 내려갈 곳으로 다 간 다음, 눈 붙일 여인숙이래도 찾을 양으로 역사를 나와 골목을 헤매었지만, 나그네가 쉴 곳은 없다. 불 켜진 집 대문을 두드려도 인적은 없고 개 짖는 소리만 마을에 퍼진다. 제자 왕근이와 스케치도 할 겸 사진도 찍어야 하는 하루가 바쁘게 열리는 새벽이다.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