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 풍경/소순희작/유화>
미루나무와 아버지
내가 태어나기 전 땅 한 평 갖지 못한 아부지는 땅찔레와 자갈이 태반인
척박한 범벌 자갈투성이 땅을 일궈 밭을 만드셨다. 그 곳은 들 패랭이와 할미꽃, 가시 땅찔레가 지천이었고
봄엔 종달새(노고지리)가 머리카락 같은 풀 뿌리를 물어다 동그란 집을 지어 새끼를 길러냈다.
모든 생명가진 가장은 책임 의식과 보호 본능을 기본으로 삼고 가는 것이 본질상 신의 뜻이지 않는가!
아부지가 개간한 물 빠짐이 좋은 모래땅 밭은 거둬 낸 자갈이 자연스레 둑을 만들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자갈을 골라냈을까.
땅이 한 뼘씩 늘어 날 때마다 소금 절인 굴비 같은 아부지의 등과 무딘 손가락 마디는 돌 같이 굳어져도
내 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으랴. 그렇게 아부지는 청춘을 그 땅에 묻으셨다.
봄이오면 고구마 순을 심고 어머니는 무명베를 짜기위해 반은 목화를 심었다.
가장자리엔 땅콩을 심었는데 모래땅에서 잘 자라는 작물들이었다.
내가 여섯 살쯤 아부지는 이른 봄 나를 데리고 밭에 가서 큰 미루나무 가지를 잘라 밭둑에 꺽꽂이(삽목)를 하셨다.
(식물의 잎이나 줄기를 잘라 번식시키는 암수 교배 없이 무성생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이 방식이다.)
약 1m 간격으로 총총히 삽목하며 밭 가에 울타리를 만든 경계가 확실해지며 새잎이 피는 미루나무는
속성수가 되어 바람이 불 때마다 후르르후르르 푸른 소리를 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는 세 살 터울의 여동생 밑으로 아이를 가지셨고 어느 여름날 몹시도 배가 아프다며
아부지 등에 업혀 논둑길로 면 소재지에 가 버스를 타고 읍내 병원으로 가다 차 속에서 사산아를 출산하셨다.
큰어머니가 아이를 받으셨다. 그리고는 동네에 소문이 퍼졌다. 인물이 훤한 사내 아이였다고...
나는 생면부지의 이름도 달아보지 못하고 죽은 동생이 늘 어린 마음 속에 와 함께 놀아주는 상상을 했다.
어머니는 밭에 풀을 매고 나는 이쁜 조약돌을 주워 동생이라고 여겨 함께 놀다 저녁 무렵이면
미루나무 밑에 몇 개의 돌로 감싸 그를 숨겨두었다. 어쩌면 근원적 애니미즘의 발로였을까?
그러면서 고무신을 벗고 들어 선 밭은 늘 부드러운 감촉으로 나를 이끌었다.
모래땅에서 잘 자란 고구마를 캘 때는 학교에 가지 않고 일손을 도왔다.
하기야 공부보다는 잘 뽑히는 모래땅 고구마 캐기가 재미났지만, 고구마 전분이 묻은 손바닥의 검은 얼룩은
좀처럼 닦이지 않아 다음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놀려댔다.
품종이 흰 고구마는 겨우내 우리 집 양식이 되어 참 많이도 먹었다. 앞마당과 뒤꼍 감나무에 홍시도 있었지만
달착지근한 물고구마는 내게 최고의 간식거리로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내겐 주식 같은 식량이 되었다.
밭 가에 미루나무가 7~8m까지 자라 멀리서도 범벌 밭은 나무의 키로 가늠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47세에 일찍 먼 길을 떠나셨고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어느 가을
자취방에서 토요일에 집에 왔더니, 누가 밭 가에 나무를 베어 갔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나는 휑한 그 자리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 나무보다 아부지의 흔적이 없어짐이 못내 안타까웠다.
도벌해 간 사람은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미루나무는 재목으로도 땔감으로도 적합하지 않은데
10여 그루가 사라짐은 가장의 부재로 인한 손 쉬운 대상으로 여긴 계획적 도벌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 간 아부지는 오시지 않는데, 이듬해 그루터기에선 새순이 무성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세월이 덧 없이 흘렀다.
그 밭도 어느 해 경지정리 구획 안에들면서 번듯한 논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넓은 벌이 되고 말았다.
유월 초에 백운산에 오르는데 백운사 초입에 큰 미루나무가 세 그루 세월을 이고 펄럭거리고 있었다.
반가워 안아보는데 정말 미루나무 꼭대기에 동요에서처럼 흰 구름이 걸려 있었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후르르후르르 푸른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와 미루나무를 보면 반갑고 정겹다.
차츰 사라져가는 수종에 속한 나무는 이제 추억 속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닐까 못내 아쉽다.
소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