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방물장수 할아버지

소순희 2021. 12. 7. 20:52

                                                      <그해 겨울/100호/1998/소순희작/Oil on Canvas>

                   

 

                          방물장수 할아버지

                                                            소순희

 

 그 방물장수 할아버지가 가위를 짤그랑대며 마을 길을 들어설 때는 겨울 오전쯤이었다.

누나들은 머리핀이나 옷핀을 사기 위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정사각형 빳빳한 종이 위에 원을 그리며 검게 꽂혀있던 머리핀을 사고 가끔은 실타래나 바늘을 사기도 했다.

키가 작은 할아버지가 등에 지고 온 사과 궤짝만 한 곳엔 생필품이며 가락엿이 고작 몇 줄 밀가루 판에 묻혀 있었다.

비싼 거라곤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참 소박한 등짐이 그 할아버지의 전 재산 같았다.

그  겨우내 시베리아의 붉은 융단 같은 모자는 손 집는 부분이 낡아 흰 천이 드러났다. 

그 밑으로 늘 엉성한 흰 귀밑머리가 보였고 가끔은 모자를 벗어 땀을 닦곤 했다. 

그때마다 달라붙은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유난히 드러난 얼굴은 겨울 햇볕에 탄 검붉은 볼이 반짝거렸고, 

언제나 도수 높은 안경이 흘러내릴 듯 콧등에 걸쳐져 있었다.

누군가를 바라 볼때마다 안경 너머로 바라보는 동공도 희뿌연 하고 눈꼬리가 젖어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할아버지의 입은 앞니 하나가 뻐드렁니로 나 있고

들린 콧구멍에선  콧수염 몇 개가 삐쭉이 자라 묘한 조화를 이룬 얼굴이었다.

 

 그날도 할아버지는 망두거리에 짐을 내려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여자들이 모여들고 이것저것 사느라고 바쁘게 흥정이 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은 파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물건 사이를 뒤집고 있었다.

"엥, 화투가 엉디갔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화투를 찾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실망이 역력했다.

"엉디갔지? 눙가 가져강거야?" 그러면서 손이 떨리기까지 하며 이곳저곳 찾지만 없다. 

그나마 그게 비싼 물건인데 없어졌으니 난감한 표정이다.

그것을 보고 나는 집으로 와서 마루에 앉아 점심 대용으로 고구마를 먹고 다시 망두거리로 갔다.

그런데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연신 짐을 뒤적이다, 멍하니 짐을 내려보다, 혼잣말로 울먹울먹하며

욕인지 자신에 대한 실망인지 화난 얼굴을 하다 흰 광목으로 꼬아 만든 멜빵으로 짐을 지고

윗동에 등구리로 졸랑졸랑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보니 참 슬퍼 보였다.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가져 갔을까?

 

 그 의문이 풀린 건 이튿날이었다.

내 동무 ㅇㅇ이가 화투를 가지고 와 그날부터 틈만 나면 우리들 몇몇은 숨어서 민화투를 치고 놀았다.

참, 철없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생각해보면 백번 천번 잘못 한 일이고

그 화투를 하며 놀았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다.

세상에 그게 어떤 물건인데 그 불쌍한 할아버지 물건을 ... 

그 후로 할아버지의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이 일이 있고부터 지금까지 기억 속에 살아있는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연한 건 살아가면서 내게 많은 교훈으로 남아 가끔은 뒤돌아보게 한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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