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우리 아짐

소순희 2021. 11. 7. 21:43

               

                                  

                           우리 아짐

                                                 소순희

 아이들의 함성이 도시의 가을 하늘로 풍선처럼 떠 오르고 있었다.

넓은 잎 플라타너스 나무가 투명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운동장 가에는
흰 운동복을 입은 어린아이들이 꼬물꼬물 모여 응원을 하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나는 키 발을 딛고 벽돌 담장 너머로
아이들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의 함성 속에
함께 묻혀 있자니 불현듯 코끝이 찡해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건 내 유년의 소상한 기억 저편으로 폴짝 뛰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가을 오후는 늘 서늘했다.
운동회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텅 빈 운동장엔 미루나무 긴 그림자가
줄지어 뻗어 있곤 했다.
이 때 쯤이면 출출해졌다. 빨리 집에 가서 삶아놓은 고구마나, 감나무에 달린 홍시를
먹을 생각에 논길을 가로질러 가면 메뚜기가 톡톡 뛰어 달아났다.

 키 큰 미루나무가 둘러선 운동장 가장자리엔 가족들과 장사꾼들의
떠드는 소리로 북새통을 이뤘고 운동장 위로 줄지어 펼쳐진 만국기 그림자가
유난히 짙었다.
시골 학교 운동회는 몇 번 없는 마을 잔치였기에 그 날 만은 일손을 멈추고
학교로 몰려들었다.
교사 뒤켠엔 잘 키워놓은 산 하나가 섬진강 지류인 요천에 그 푸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철 곱게 서 있었다.

 2학년 운동회 날 아부지와 엄니는 논밭으로 나가시고
나는 5학년 누나와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로 갔다.
일손이 늘 달리던 우리 집은 하루도 쉴 수 없다 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던 터라
그도 감지덕지 했다.
학교 지붕 위 마이크에선 선생님의 들뜬 목소리가 우렁찼고 만국기는 펄럭펄럭 나부꼈다.
오전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는 누나와 학교 담 밑에서, 싸온 도시락과 삶은 고구마와 밤을
서둘러 먹고 여기저기 구경을 했지만 용돈이 없어 그것도 시들했다.
문득 눈에 띄었던 목 잘린 빨간 크레파스가 생각나 그것을 줏어 들고
학교 뒷 벽에다 자동차와 아이들을 막 그려댔다.
주눅 든 의식으로 외로운 감정을 쏟아내던 어린 소년의
상심에서 비롯된 마음의 표현 이었으리라.

"다음은 2학년 청군 백군 게임이 있겠습니다. 학생 어머니는 나오셔서
학생들과 서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서둘러 누나를 찾았고 누나는 휴억 엄마인 아짐을 모시고 와 내 옆에 세워 줬다.
휴억은 나보다 1년 후배인지라 우리는 형제처럼 지냈다.
대나무로 눈사람처럼 둥글게 엮어 종이를 붙이고 멜빵을 매단 오뚝이를 지고
어머니와 손잡고 운동장 가운데 말뚝을 돌고 와서 다음 아이에게 벗어 주면 되는 게임이었다.
나는 아짐 손을 잡고 뛰며 눈물이 났다.

 내가 젖먹이 때 엄니는 고구마 밭에서 잎줄기를 따다 독사에 물렸다.
그 독이 젖먹이 아기인 내게 좋지 않다고 젖을 물리지 못하게 했고
나는 분유가 굳어 덩어리진 우유를 끓여주면 용케도 알아 입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엄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배가 고파 울다 쳐지면 아짐에게 가서 젖동냥 해 먹이곤 했는데
그 젖 물고 있는 나를 볼 때 엄니는 아짐께 얼마나 고마워 했을까.
자식 입에 먹을 거 들어갈 때 부모 맘은 가장 흐믓 하다고 하던데
그 인연이 얼마나 크고 깊은가!

 이제 운동회는 끝났다.
쓸쓸했던 기억 밖으로 밀려난 한 시절이 그 오뚝이처럼 빙그레 웃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는 무언의 약속으로
엄니와 아짐의 강물 같은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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