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113

어느 해 봄날에

어느 해 봄 날에 소순희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서며 끼이익 쇳소리가 신경을 건드린다.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어느 역에서 일이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건장한 남자 셋이 열차에 오르더니 통로에 버티고 서서 다소 위압적인 분위기로 수없이 해 보았을 법한 말들을 쏟아낸다. "여행 중인데 불편을 드려서 대단히 죗쏭합니다. 자, 여러분께 행운의 기회를 드리고자 여기서 몇 말씀 드리는것은, 다름 아니라 한국 광학기기의 선구자적 사명으로 최첨단 카메라를 만드는 회사로써 신제품을 선전 하기 위해서 올라온 임직원 입니다. 오늘 행운권을 드리고 당첨되신 분께만 수고비 쪼로 단돈 4만 원에 카메라 한 대를 드리오니 써 보시고 널리 선전 좀 해 주십사 하고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감솨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호가 쓰인..

어머니의 유품

어머니의 유품 소순희 열 두어 쪽으로 조각난 질그릇이 베란다 창가에 나뒹굴었다. 바람에 빨래건조대가 넘어지면서 떨어뜨려 깨어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유품이랍시고 보관해 왔던 간장을 나눠 담던 작은 그릇이다. 볼품없고 하찮은 것일지언정 내게는 귀중한 어머니의 유품이다. 열 살 무렵 네 살 남동생(외삼촌)을 남기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큰집에 얹혀살면서 두 남매가 받은 구박과 눈칫밥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고 어린 날을 가끔 회상하곤 했다. 배고파하는 네 살 동생을 장독대 뒤로 불러, 숨겨온 눌은밥을 떠먹이며 얼마나 마음졸였을까 깡마른 동생이 마루 끝에 앉아 방아깨비처럼 깐닥깐닥 발을 흔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기억은 소멸되고 짧은 기록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1949년..

꾀꼬리

꾀꼬리 그날도 아이들은 마을 앞 소나무 숲에서 놀다 무료해지면 새 집을 찾아 이마에 손바닥을 펴 햇볕을 가리며 키 큰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터를 잡고 마을이 형성될 때 심어진 수령이 몇백 년 됨직한 느티나무와 백여 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룬 곳은 늘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어르신들은 느티나무아래서 여름 더위를 피했다. 도랑을 하나 건너면 참나무(도토리나무)가 또 다른 초록 군집으로 숲을 이룬 채 고즈넉이 소나무 숲과는 다른 빛깔로 부드럽게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가을에 도토리를 따기 위해 큰 돌로 나무의 허리를 쳐서 푹 파인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이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다. 그곳엔 봄이면 말벌과 사슴벌레와 풍뎅이가 몰려와 수액을 먹느라 영역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우리는 고무신을 벗어 말벌을 낚아채 빙..

새끼노루

새끼노루 소순희 오월쯤이었지 싶다. 무더운 기운이 온 대지위에 쫙 깔렸고 찔레꽃이 피어날쯤 덤불 밑에 새순이 붉은 잎새를 피워 낼 때면 새순을 꺾어 껍질을 벗기고 연한 속살은 씹으면 향긋하면서 달착지근한 맛이 시골 아이들에겐 좋은 간식거리였다. 일곱 살 되던 해 봄, 그날도 순성이와 찔레덩굴 밑을 기웃거리며 새순을 찾으려 가랫들 밭언저리를 쏘다녔다. 공중에선 종달새가 높이 떠 지저귀고 들에선 아지랑이가 흐물흐물 피어올랐다. 밀밭 길을 걷는데 꿈결인 듯 어디서 매애 매애 하고 울음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가 보았다. 어린 우리 가슴께만큼 자란 밀밭 속 밀을 깔아 뭉개놓은 곳에 누른빛 노루 새끼 두 마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누워 있었다. 바짝 선 귀와, 검은 눈,촉촉한 검은 콧잔등이 참 귀여웠다. ..

손 (手)

손(手) 소순희 얼마 전 화우모임이 있어 인사동에 나갔다. 예전의 인사동 거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고풍스러운 골동품이나 그림전시관은 사라지고 기념품이나 옷가게가 주류를 이룬다. 그나마 몇 군데 화랑이 예술인이나 관람객을 맞고 있어 예전의 인사동이란 명맥을 유지함이 씁쓸한 현실이다. 어느 식당에서 몇 분 화우들과 반갑게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좀 늦게 원로화가 한 분이 오셨다 . "어, 미안하오,내가 좀 늦었네," 하며 손을 내미는 그분의 조그만 손가락 끝에 초록 물감이 묻어 있다. 작업하다 바삐 나오시느라 손도 못 닦고 나온 것 같지만 유화물감은 쉽사리 지지 않음은 화가들은 다 안다. 그날따라 그분의 조그만 손이 멋지고 진솔하게 다가옴은 그 손이 말해줌을 보았다. 농부의 손이 작고 부드럽다면 어울리겠..

유년의 겨울

유년의 겨울 -귀신 놀이 소순희 겨울밤은 길고 무료하다. 이따금 개짖는 소리만 밤하늘에 컹컹 울려 퍼지고 고요하다. 그 시절만 해도 TV 라곤 마을 회관에 달랑 한 대, 흑백 상영되는 연속극이나 유머 코너가 인기였지만 그나마 어르신들의 차지다.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는 겨울밤이면 아주머니나 누나들은 삼삼오오 누군가의 집에 모여 민화투나 수다로 삼경이 지나도록 겨울밤을 지내곤 했다. 별도 달도 구름에 가려 어둠이 깊게 드리워진 돌담 골목은 늘 고요가 누워 있었다. 간혹 구름을 빗겨난 달이 감나무 가지를 희미한 그림자로 그려내며 어둠을 밀어냈다. 긴긴밤은 남자아이들도 무료하긴 마찬가지다. 그럴 때면 휴억과 나는 재밌는 놀이가 없을까 궁리를 하고 작전(?)을 짜곤 했다. "야! 우리 귀신 놀이할까?" "그래,..

후쿠오카 텐진에서

후쿠호카의 일몰 일본 유명작가(中山忠彦)작 유후산(1,538m)이 보이는 유후인 후쿠오카 텐진 에서 소순희 11월 하순 후쿠오카의 초겨울은 10도 안팎 기온으로 온화한 편이다. 겨울을 기다리는 텐진거리의 젊음이 활기차다. 어느 곳이나 도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쇼핑몰이나 식도락가이다. 커피 한 잔 생각에 쇼핑가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들렀다. 이럇사이마세(어서오세요)라고 반기는 주인장은 80대로 보이는 이마가 튀어나온 귀여우신 짱구 할아버지이다. 앞치마를 두른 채 써빙하는 모습이 일에 감사와 기쁨이 배어 있다. 쇼핑몰 한켠에 조용한 분위기의 베이지 톤 벽과 작은 티테이블 몇개가 소박하게 놓여진 직사각형의 실내는 커피향이 밴 오래된 공간으로 벽에 걸린 그림이 눈길을 끈다. 명제와 작가명이 붙은 수채화와 ..

박준지 선생님

박준지 선생님 사 학년 여름방학 끝 무렵이었지 싶다. 나는 까맣게 탄 얼굴에 윗옷은 엷은 포플린 남방셔츠 하나 걸친 것 아니면 거의 벗고 사는 터라 흙빛 등은 어깨뼈가 유난히 드러났고 갈빗대가 드러난 가슴엔 간혹 하얗게 손톱자국이 줄을 긋곤 했다. 그날도 돌담을 끼고 돌아가는 산밑 길로 나뭇잎 무늬가 그려진 반소매 남방셔츠를 벗어 휘휘 돌리며 지름길인 순구 형네 밭둑을 지나 용식이네 집으로 마실을 가고 있었다. 방죽골로 접어드는 초입엔 오래된 류 씨 집안 제각을 관리하는 용식이네 집이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 고즈넉이 누워 있었다. 막 밭둑을 내려와 길 가장자리로 몇 걸음 후루룩 내려오는데 나는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그곳 탱자나무 그늘에 그토록 보고팠던 선생님이 나를 보며 웃고 서 계셨다. 하양 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