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손 (手)

소순희 2018. 1. 27. 23:56

 

                                <누님생각/4호/Oil on Canvas>         

 

                                 

          손(手)

                               소순희

 

 얼마 전 화우모임이 있어 인사동에 나갔다. 

예전의 인사동 거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고풍스러운 골동품이나 그림전시관은 사라지고

기념품이나 옷가게가 주류를 이룬다.

그나마 몇 군데 화랑이 예술인이나 관람객을 맞고 있어

예전의 인사동이란 명맥을 유지함이 씁쓸한 현실이다.

 

 어느 식당에서 몇 분 화우들과 반갑게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좀 늦게 원로화가 한 분이 오셨다 .

"어, 미안하오,내가 좀 늦었네," 하며 손을 내미는 그분의

조그만 손가락 끝에 초록 물감이 묻어 있다.

작업하다 바삐 나오시느라 손도 못 닦고 나온 것 같지만

유화물감은 쉽사리 지지 않음은 화가들은 다 안다. 

그날따라 그분의 조그만 손이 멋지고 진솔하게 다가옴은

그 손이 말해줌을 보았다.

 

  농부의 손이 작고 부드럽다면 어울리겠는가,

투박하고 거친 마디마다 갈라져 있고

손톱 밑이 새까맣게 흙물이 들어 있어도 얼마나 아름다운 손인가.

나는 어릴 적 아버지의 그런 손을 자주 보았다.

때론 갈라진 마디에서 피가 배어나곤 했지만

한 줌 흙으로 휙 비벼버리면 끝이었다.

농부들의 새참 시간엔 양은 주전자에서 하얗게 쏟아지는 막걸리를

양재기에 받아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코끝이 젖도록 들이마시며 크아~하고 고개를 젖혀 비워냈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징검징검 김치를 집어

우적우적 씹는 그 꾸밈 없는 진실한 노동과 쉼을 어찌 가벼이 여기랴.

 

 감기에 걸려 신열이 나 땀 흘리고 누워있을 때,

이마를 짚으며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손,

그 다정한 손길과 마음에서 손끝으로 전해오는 사랑을 나는 안다.

배 아플때  "에미손이 약손이다."하고 리듬을 넣어

배를 쓸어주시던 따뜻한 어머니의 손,

대여섯 살쯤 아침에 일어나면 눈곱이 붙어

눈이 떠지지 않을 때 어리광을 부리며 울면

어머니는 밥하다 오셔서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

내 눈을 씻어주며 "인제 됐다 잉" 하셨다.

그게 불결하거나 더럽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예수님은 침을 뱉어 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했을 때 눈을 떴다.

 

 초등학교 시절 잠깐 임시교사로 와있던

여선생님의 하얀 손은 또 얼마나 이뻤던가!

숙제해간 공책을 나눠주며 슬쩍 스친 선생님의 차고 부드러운 손길은

여성의 상징처럼 섬섬옥수로 연약함과 보호 본능을 느끼게 해줬던 손이었다.

 

 누님은 뒤란 장독대 옆에 봉숭아를 심었다.

해마다 늦여름엔 봉숭아 꽃잎을 따서 손톱에 꽃물을 드리곤 했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손톱에 꽃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을 만난다나 그래서 막연히나마

그 설렘을 기대하며 지내던 어린 시절

이젠 아득한 세월 뒤로 밀려나 꿈만 같다.

 

 각자 가진 직업에 따라 손은 거기에 익숙해지며 

신체 일부로 제 역할을 감당한다.

손은 마음에서 나오는 명령체계로 가장 많은 일을 해내지 않는가.

나는 어떤 의미의 손으로 일하는 것을 통해

어느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며 도움이 될까.

부지런하고, 돕고, 가리키고, 바르게 짚어가며

일하는 손이 있기에 즐겁게 살아가야 할 이유밖에 없다.

손이 가리킬 때 손끝을 보지 말고 가리키는

목표 지점을 보아야 그곳에 도달할 수 있듯이 오늘도 손은

여전히 먼 곳 목표지점을 가리키고 있으니 그곳을 향해 묵묵히 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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