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새끼노루

소순희 2018. 3. 11. 18:56

 

                                       <그들만의 삶/15호/유화/소순희그림>

                        

             새끼노루

                                                                         소순희

 

오월쯤이었지 싶다. 무더운 기운이 온 대지위에 쫙 깔렸고 찔레꽃이 피어날쯤 덤불 밑에 새순이 붉은 잎새를 피워 낼 때면

새순을 꺾어 껍질을 벗기고 연한 속살은 씹으면 향긋하면서 달착지근한 맛이 시골 아이들에겐 좋은 간식거리였다.

일곱 살 되던 해 봄, 그날도 순성이와 찔레덩굴 밑을 기웃거리며 새순을 찾으려 가랫들 밭언저리를 쏘다녔다.

공중에선 종달새가 높이 떠 지저귀고 들에선 아지랑이가 흐물흐물 피어올랐다.

밀밭 길을 걷는데 꿈결인 듯 어디서 매애 매애 하고 울음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가 보았다.

어린 우리 가슴께만큼 자란 밀밭 속 밀을 깔아 뭉개놓은 곳에 누른빛 노루 새끼 두 마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누워 있었다.

바짝 선 귀와, 검은 눈,촉촉한 검은 콧잔등이 참 귀여웠다.

무엇이든 키워보고 싶은 것이 시골 아이들의 본능인지 그 자그마한 새끼 를 한 마리씩 안고 밀 밭을 나왔다

.어디선가 어미 노루가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얼굴에선 삐질삐질 땀이 배어나고 노루 새끼의 긴 다리는 땅에 끌릴 듯 어정쩡하게 안고 집으로 왔다.

이제 엄마에게 보이면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마당에 들어서자 엄마는 놀란 눈으로 

"야가, 시방 뭣을 안고 왔다냐 그거이 노리 새끼아녀?" 

"잉~쩌그 가랫들 외동할매네 밀밭에서 잡아 왔어"

"야야, 그런 거 잡아 오면 못써,에미가 얼매나 애간장이 타겄냐.핑 갖다 놓고와라 잉"

엄마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꾸지람이 더 많았다. 나는 노루 새끼를 안고 순성이네 집으로 갔다.

순성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할머니께서 다시 갖다 놓으라고 해서 안고 나오는 중이었다.

우리는 다시 밀밭으로 가면서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어주기도 하고 길가에 주저앉아 풀을 뜯어 입에 대어 줘도 먹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힘든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밀밭 속 그 자리에 노루 새끼를 내려놓고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우리는 늦봄 속으로 하늘거리며 돌아왔다.

 

고향 어르신들의 삶에는 약한 것과 생명 있는 것을 함부로 잡거나 죽이는 어떤 불문율이 있다.

매에 쫓겨 집으로 날아든 꿩을 보호해서 다시 날려주는 일이라든가, 눈이 쌓여 먹이를 찾아 집으로 든 산토끼나 노루는 절대 잡지 않는다는 것과,

감나무에 남겨둔 까치밥(감)이 굶주린 조수를 위한 것이라든지 새끼 딸린 에미는 잡지 않는 것이 그런 것이다.

십수 년 전 사냥개에 쫓겨 마을 어느 집으로 숨어들어 마당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노루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대문을 잠근 후 돌담을 넘으려는 노루의 허리를 작대기로 후려쳐 잡은 형이

일도 잘 풀리지 않고 끝내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무릇 생명 있는 것은 귀중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에선 사람이 지켜주리라는 믿음으로 인간 곁으로 쫓겨온

연약한 짐승들을 보호해서 공존함이 인간이 갖는 최소의 기본 정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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