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유년의 겨울

소순희 2017. 12. 23. 22:36

 

                           <겨울 고추밭/6호/2017/최경옥님소장/ 소순희작>

유년의 겨울 -귀신 놀이

                                               소순희

겨울밤은 길고 무료하다. 이따금 개짖는 소리만 밤하늘에 컹컹 울려 퍼지고 고요하다.

그 시절만 해도 TV 라곤 마을 회관에 달랑 한 대, 흑백 상영되는 연속극이나

유머 코너가 인기였지만 그나마 어르신들의 차지다.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는 겨울밤이면 아주머니나 누나들은 삼삼오오 누군가의 집에 모여

민화투나 수다로 삼경이 지나도록 겨울밤을 지내곤 했다.

별도 달도 구름에 가려 어둠이 깊게 드리워진 돌담 골목은 늘 고요가 누워 있었다.

간혹 구름을 빗겨난 달이 감나무 가지를 희미한 그림자로 그려내며 어둠을 밀어냈다.

 

긴긴밤은 남자아이들도 무료하긴 마찬가지다.

그럴 때면 휴억과 나는 재밌는 놀이가 없을까 궁리를 하고 작전(?)을 짜곤 했다.

"야! 우리 귀신 놀이할까?"

"그래, 좋~아, 근데 어떻게~"

"할아버지 흰옷과 낚싯줄~"

"간단하네~ㅎ"    

낚싯줄로 묶은 흰옷을 들고 아주머니들이나 누나들이 각기 집으로 돌아갈 즈음 우리는 밖으로 나간다.

골목 입구 창호형네 감나무 가지 위로 낚싯줄을 던져 올리고 옷은 길바닥에 펼쳐 놓았다.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희미한 어둠은 오늘 밤 우리 편이다.

사람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옷이 유달리 무서워 보이는 건 으슥한 달빛 아래여서 인지 모른다.

이윽고 희희낙락거리며 한 무리의 여자들이 골목으로 들어서고 길에 누워 있는 옷을 보곤 웃음이 뚝 그친다.

이때다 싶어 우리는 십여 미터쯤 언덕 아래 숨어서 낚싯줄을 잡아당기자 옷이 스르륵 일어서자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오던 길로 도망친다.

"크큭 성공이야!"

"그래도 기절 안한 게 다행이군~ㅎ"

아주 멋지게 속였다는 짓궂은 장난에 겨울밤은 곤히 스러지고 다시 놀던 집으로 돌아간 여자들은

그밤 잠 못 이루며 꼬박 지새고 말았다.

그 이튿날 마을엔 귀신 봤다는 이야기기 쫙 퍼졌다.ㅎ

두눈 똑 바로 뜨고 함께 보았다고 거짓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그분들은 이제 할머니가 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일을 발설하지 못 한건지 안 한건지... 세월이 많이도 흘러 버렸다.

지금에와 그 추억을 생각하며 슬며시 웃음지어 보이는 이 겨울도 그 때처럼 아득히 깊어간다.

                                                                                                       

                                                                                                    2017/12

 

'추억그리고 현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1일  (0) 2018.03.01
손 (手)  (0) 2018.01.27
후쿠오카 텐진에서  (0) 2017.11.25
박준지 선생님  (0) 2016.03.20
뒤란 풍경  (0) 2016.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