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박준지 선생님

소순희 2023. 5. 19. 22:26

 

 

 

 

 

                                    <미코노스 섬(Mykonos)의 하루/소순희작/2015>

 

 

 

                                      박준지 선생님 

 

                                                                        소순희 2016

 

 사 학년 여름방학 끝 무렵이었지 싶다.

나는 까맣게 탄 얼굴에 윗옷은 엷은 포플린 남방셔츠 하나 걸친 것 아니면 거의 벗고 사는 터라

흙빛 등은 어깨뼈가 유난히 드러났고 갈빗대가 드러난 가슴엔 간혹 하얗게 손톱자국이 줄을 긋곤 했다.

그날도 돌담을 끼고 돌아가는 산밑 길로 나뭇잎 무늬가 그려진 반소매 남방셔츠를 벗어 휘휘 돌리며 지름길인 순구 형네 밭둑을 지나 용식이네 집으로 마실을 가고 있었다.

방죽골로 접어드는 초입엔 오래된 류 씨 집안 제각을 관리하는 용식이네 집이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 고즈넉이 누워 있었다.

막 밭둑을 내려와 길 가장자리로 몇 걸음 후루룩 내려오는데 나는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그곳 탱자나무 그늘에 그토록 보고팠던 선생님이 나를 보며 웃고 서 계셨다. 하양 반소매 원피스에 리본이 달린 흰 모자를 약간 뒤로 재껴쓰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계셨다.

백옥처럼 뽀얀 얼굴에 엷게 붉은 입술이 맑았다.

실눈을 뜨고 웃을 때마다 앞니 두 개가 유난히 하얗게 드러나는 선생님의 입술이 참 예뻤다.

작은 키와 연약해 뵈는 몸매는 늘 보호 본능을 느끼게 하는 특유의 흡인력이 있었다.

선생님은 몸에 비해 큰 가방 두 개를 양쪽 발 밑에 세워둔 채 쉬고 있었던 터다.

 

"순희야, 이 가방 좀 들어줄래?"

"....."

나는 윗옷을 벗고 있었고 그날 세수도 하지 않았다는 부끄럼으로 몸을 비비 꼬며 도망치다시피 용식이네 집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얼핏 실망한 눈빛이 스쳐 지난다. 산 초입부터 절까지는 6~7백미터쯤 산길인데 어떻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가셨을까?

나는 용식이네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탱자나무 그늘에 서 있던 선생님께로 온전히 꽂혀 있었다.

아! 선생님은, 그 시절 까맣게 그을린 시골 소년의 수줍은 마음을 아셨을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들어 드리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 되는 건, 그 연약한 흰 얼굴의 선생님이 몇 발자국 가서 쉬며 올랐을 길이 너무나 가파르고 내 맘속에 느껴 본 예쁨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던 까닭이리라.

 

 고남산 중턱에 작은 암자인 창덕암이 있고 그곳 절 대처승의 따님이 선생님이다.

창덕암은 1933년 창건된 기도처로 인근에 유명한 작은 사찰이다.

고남산은 태조봉이라고도하는 명산이다. 고려말 나라를 어지럽히며 속수무책으로 진격하던 왜군의 폭거 앞에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간 군과 민의 넋을 위해 이성계는 고남산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리곤 황산 전투에서 누구도 대항하지 못한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승리로 이끈 역사의 일부로 껴안고 있는 산이다.

뾰쪽한 봉우리를 타고 내려오면 암벽이 직벽처럼 버티고 선 중턱에 암자가 아담하게 들어선 오른편으로 

바위벽을 타고 내리는 흰 물줄기는 옥양목을 펼쳐놓은 듯 길게 뻗어내려 절 하나쯤 숨겨 놓을법한 곳이다.

 새 학년 새 학기가 되면서 배정되지 않은 담임 선생님의 부재로 선생님은 임시로 우리 반을 가르치다 새 선생님이 오시고 학교를 떠나신 뒤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날부터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그러함이 이성에 관심과 눈뜸이라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곤 차츰 잊혀가던 여름, 나는 선생님을 탱자나무 울 그늘에서 뵌 것이다.

 

 산수 시간 분수를 풀지 못한 네 명이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던 어느 봄날, 창피함보다 선생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더 즐거웠던 순간을 선생님은 눈치채셨을까?

그 속앓이가 어쩌면 시골 소년의 감성을 자라게 했던 한 때였음을 고백한다.

속절없이 세월은 흘러 지금 어디 계실까?

그 모습 그 교실 봄 창가에 서서 영원히 웃고 계신 그리운 선생님 안녕!

 

                                                                                                       

                                                                           소순희(부절초등학교 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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