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운동화 도둑

소순희 2023. 7. 6. 21:13

                                                 운동화 도둑

                                                                                   소순희

 

종례를 마치고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급우들 뒤로 엇비쳐드는 서녘 햇살 줄기 속에 뽀얀 먼지가 떠다닌다.

복도 한쪽 벽 붙박이 신발장엔 한 켤레의 신발도 남지 않았다.

나는 순간 아찔하다. 이 주일 전에 새로 산 내 운동화가 있어야 할 41번 자리에 없다.

몇 번이고 교실을 돌아보고 신발장을 기웃거려 봐도 칸칸이 비어 있다.

울컥 목울대까지 치켜드는 상실감에 막 눈물이 나며, 어머니 얼굴이 오버랩 된다.

 

 검정 운동화 한 켤레로 한 학기를 버텨온 터라 닳아빠진 발바닥 밑에 밟히는 작은 돌의 촉감과 수없이 빨아 희끄무레 색 바랜 운동화의 앞머리 부분과 너덜거리는 뒤꿈치, 그리고 끈을 꿰는 눈이 두어 개 빠진 낡은 운동화를 어머니께 보이며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어렵사리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피 같은 돈을 쥐여주며 "아껴 신거라" 하신다.

그런데 이주일 신고 잃어버렸으니 어찌 속상하지 않으랴.

교정의 벚나무 아래서 나는 온갖 생각을 하다 학생들이 다 돌아간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맨발로 자취방에 와서 어떡하면 좋을지 곰곰 생각하다 퍼뜩 묘안이 떠오른다. "그래, 나도 훔치는 거야!"

 

 그 무렵 학교에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선발해서 중3 특수반을 한 반 신설해서 밤늦도록 공부를 시켰다. 나는 그들은 공부도 잘하고 부잣집 아이들일 거라고 애써 각인시키며 어둑해진 학교로 갔다. 3학년 8반!

흰 회벽의 3층 건물 우리 반의 창문 안엔 어둠이 꽉 차 있다.

늘어진 히말라야시다 나무의 어두운 그늘을 밟으며 교무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불 밝힌 8반 교실 가까이 다가갔다.

그 교실은 1층 교사로써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나지막한 목조 건물로 화단엔 가이스가 향나무가 꿈틀거리며 사철 푸르게 타오르고 있다.

나는 신발장이 있는 창가로 다가서서 유리창를 밀었다 . 찌지직 창문이 열리고 신발장에 손을 내밀어 적당히 잡힌 운동화 한 켤레를 집어들고 냅다 뛴다. 그리 낡아 뵈지 않는 운동화를 훔쳐 오면서 안도와 죄책감이 교차한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의 발이라 짐짓 크기를 가늠하지 않아도 얼추 발에 맞는 신발은 적당히 빛바래 길들여진 것이다.

누군가가 오늘 맨발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잠을 설친다.

그  이튿날부터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학교 가는 길이 운동화 무게보다 엄청 무거워졌다.

 

 차츰 그 일로부터 익숙해졌는데도 쉬는 시간이면 신발장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운동화를 훔쳐 간 녀석이나 훔친 나나 운동화 도둑이었던 그 어려운 한때를 지나오며 나는 모두가 힘든  처지 때문이라는

상황설정을 해가며 합리화시키는 단순 논리에 포함시켜버리는 모순을 범하고 말았다. 어렸던 시절 한편에 늘 도사리는 죄책감으로 티 없이 맑아야 할 어린 마음 한 구석을 괴롭히던 이중의 짐들을 내려 놓기는 한 참 후의 일이지만 그 일이 쉬이 잊힐 리야 있겠는가 말이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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