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그 누님에 대한 추억과 회한

소순희 2023. 9. 20. 08:02

    그 누님에 대한 추억과 회한

 

                                                                  소순희

그 누님이 실성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아마 가을걷이 후의 빈 들판이 늘어 갈 즈음으로 기억한다.

실지로 누님은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다녔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퀭한 눈이 깊었다.

초등학교 1~2학년인 아이들의 입에선 거침없이 미친년이라는 욕설과 함께 그 누님이 가는 길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사람을 포진한 채 놀리며 흙이 붙은 벼 포기를 던지고 작은 돌을 집어 위협하곤 했다.

그게,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악함이 발동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잔인성으로 표출되는 일종의 군중심리로 작용한 본질적 죄성이리라.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같은 맘을 지닌 이유에서 누가 선한 사람으로 남아 과연 그 어린 녀석들의 행위에 침을 뱉겠는가.

 

 나도 그 못 된 대열에 합류한 채 스무 살 남짓한 그 누님을 얼마나 구박했던가. 그때마다 우리를 잡으러 좇아오면 도망가고 다시 몰려가 놀리는 꼴이 쇠파리를 쫓으면 다시 엉겨 붙어

괴롭히는 것처럼 끈질긴 잔인성이 얼마나 철없고 어이없는 일 있었던가를 깨닫게 된 것은 오랜 후였다.

그날도 막 쫓기다 나는 넘어지고 말았다. (이젠 죽었구나!) 하고 있는데 씩씩거리며 돌을 집어 들고 다가온 그 누님이 쓰러진 채 기겁하며 일어서지도 못하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괜찮니? 묻곤 흙먼지를 털어 주었다.

의외의 행동에 나는 잠시 마음이 편해졌고 얼굴을 들어 바라본 퀭한 눈에 글썽이던 눈물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어디서 흘러들었는지 모를 노파와 문씨 일가의 아들과 딸이 마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밤나무 숲 가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마당엔 큰 바위들이 그대로 박혀 있었고  키 작은 채송화며 백일홍이 붉게 피곤했었다.

가랫터 논밭을 가자면 그 집 뒤로 난 길을 가면 되는데 나는 소 꼴을 베러 갈 때 몇몇 친구와 

그 집 앞을 지나가곤 했다. 그러면 그 누님이 우리를 불러 먹을 것을 줬고 때로는 무릎에 누이고 귀를 후벼 주곤 했는데 그 간질거림에 스르르 눈이 감기고 집 앞 풍경들이 정지된 한 폭의 그림으로 보이곤 했다.

 

 그런 누님을 실성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괴롭히던 유년 시절도 덧없이 세월의 강물로 흘러가 버리고 조금씩 옳고 그름을 분별할 때는 이미 그 집은 빈집으로 남고 후일엔 오래전 사람이 살았다는 자취만 남고 뜯기고 말았다.

 

 무심한 것일까? 아님, 잊어버리자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 속죄의 의미였을까. 그렇게 또 시절은 덧없이 흘렀다. 그리고 도회지 생활 중 나는 군대 문제로 귀향했고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독자였던 터라 의가사 명을 받아 지역 중대에서 근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부의 하달 명령을 전하려 식정동 예비군 소대장 집에 갔다. 삼각형의 마당 가장자리로 향나무 울타리를 친 그리 높지 않은 언덕배기에 옹색한 작은 집, 아! 거기서 소대장의 아내가 되어 있는 광대뼈가 유난히 돋아나고 퀭한 눈의 깊음과 조용한 음성의  오래전 그 누님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저 아시겠어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저 그럼 중절리라고 아세요?"

"네 알다마다요."

"제가 00누님의 동생입니다."

애써 기억을 더듬는 모습이 약간의 눈을 찡그림에서 발견 할 수 있었다.

"응 맞어, 그러고 보니..낯이 익어..."

"그간 잘 지내셨어요?"

"응, 근데 누님은 잘 지내?"

"네 시집가서 잘 살고 있어요."

 

 나는 울컥 뭔지 모를 서름이 북받쳐 옴을 느꼈다.

그간 깜박 속은 것 같은 세월 속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낚아 올리려는 듯 가만히 생각에 젖던

그 누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름은 기억 나지 않고 성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문00 누님을 그 후론 한 번도 뵙지 못했다.

내 큰 누님보다 서너 살 많은 그분. 세월의 무상함보다 나는 그 철없던 어린 시절의 꿈같은 기억이 자연스럽게 잘 못을 회한하는 계기가 되어줬고 사랑은 타인의 아픔을 최소한 이해하려는데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인연도 바람처럼 스쳐 지났지만 내게는 선한 눈을 가진 고향의 한 분임을 잊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2005.8.소순희 

 

                                                                              <이른봄/2003/10호/소순희작>

 

                                                                        <짤쯔의 외곽지/2003/10호/소순희작>

 

                                                                    <학일리의 겨울/2011/10호/소순희작>

 

                                                                                            <문화쎈터에서/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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