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
여기 한 장의 백지를 남기고
저문 길을 갑니다
어느 누구 여기 오시면
먼저 간 이들의 발자취 남아 있듯
그대 이름 남겨 두고 오십시오
세상에 미운 것 예쁜 것
그대로 한 편 시가 되는데
바람이 지나면
나뭇가지 흔들리고
물이 흘러간 자리 흔적이 남는 것
사는 일 잠깐이지만
이 세상 진저리나게 살아도 보시고
사랑도 넘치게 베풀어 가며
노란 가을 길 걸어 보십시오
그때 남은 빈손으로
그대 이름
여기 한 장의 백지 위에 남겨 두고
저문 길 편히 오십시오.
아버지의 몇 줄 글에부쳐...
1988소순희
아버지는 삼 간 집을 지으시고 흰 회벽을 바르셨다.
그리고 어느날 그 회벽에 연필로 세로쓰기한 글씨가 이제 막 돋아나는
아기의 고운 이처럼 곱게, 염소나 송아지 사오신 날과
새끼 난 날을 적어두셨다.가끔은 시어처럼 몇 줄 글이 씌여졌고
나는 글 뜻을 이해하지 못 했다.
아버지는 내게 설명해 줄 시간도 없이 급히 먼 길을 떠나셨다.
내가 나이 들면서 아버지의 유품이래도 있었으면 하고 고향 집 회벽의 글을
사진으로 찍어 올 요량으로 그곳에 들렀지만 이미 벽은 허물어지고 마당엔 풀만 무성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고향집은 텃밭으로 변해있다.
아버진 내마음속 방명록에 이름 석 자 남기고 그렇게 서둘러 먼 길 떠나셨다.
<제주 바다/ 6F /소순희 작/2003/Oil on Canv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