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동이 보이는 풍경/1994/10호/소순희작/Oil on Canvas>
그림 그리며 산다는 게 결코 예사롭지 않은 삶이란 것을 깨달은 것은 결혼 후의 반복된 생활 리듬이나
가난에서 오는 균형을 잃어버린 비대칭적인 정신의 균열에서 비롯된 자아를 발견하면서부터다.
이 길이 부나 명예를 위한 방편이거나 가족의 평안을 가늠해 줄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다만, 색채의 일관된 순수성이나 아름다움에 반한 청년의 오기나 객기로부터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불안한 자신의 나약한 심성을 가족의 희생으로 조금씩 치유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금천구 독산동으로 흘러든지 수 해, 전세 단칸방의 삶이 오죽했으랴.
그즈음 스스로 친구들과의 격리와 소외의 이중적 무게감에 늘 찾는 것은 신의 존재였고, 그것은
위로와 평안을 얻고자 자신을 끌어들인 교회를 피안의 도피처로 삼고 체득하기 위한 귀의였다.
그해 추석명절이 오고 나는 시골에 가지 못했다.
차츰 그림에 혼을 빼앗기며 열정적으로 정신을 몰입하는 삼십 대 후반기는 사회에 대한 냉담과 반항도 서릿발처럼 자라고 있었다.
추석 명절이라 쉬는 날에 나는 아내와 아이 몰래 화구를 챙겨 124번 버스를 타고, 그 당시 광명시 소하리
(지금은 KTX역이 가깝고 이곳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곳이다. 격세지감이다.)
어느 한적한 공동묘지의 끝자락에 이젤을 펴고 폴 세잔의 생트 빅토와르 산을 닮은 시흥동의 뒷산이 보이는 풍경을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
산이 직벽처럼 보이는 곳이 관악의 지산인 시흥동 뒷산이다. 그아래 호압사가있고 터널을 지나면 관악구 신림동이다.
산 아래 도시의 건물들이 희게보이는 가을녘이 아직은 따가운 볕을 받고 있었다
가족에겐 더없이 미안하고 후회 막급이지만 그래도 그 열정에 조금은 사죄의 기분이드는 건 순전히 나만 갖는 일종의 위안이다.
소순희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는데 궁궐을 지으면 무너지곤했다.
그 이유는 궁궐에서 바라다 보이는 호랑이 형상의 호암산의 기가 세서 그랬다고한다.
그래서 그 기운을 누르려고 그 아래에 호압사라는 절을 지어 호랑이 기를 제압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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