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살구나무에 대하여

소순희 2024. 5. 4. 21:22

                                                      <해뜨는 집/소순희작>

                   

 

                           살구나무에 대하여

 

                                                             

 지난여름 아파트 화단에 잘 익어 떨어진 살구를 밟고 지나간 곳에

단단한 씨만 튀어나와 있어 아침 산책길에 주워서 운동기구가 설치된 소공원 구석에 묻어 두었다.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한 늦가을부터 겨울이 다 가도록 한 번도 그곳에 산책을 하지 않았다.

매화나무가 꽃망울을 터드리는 봄에 다시 그곳에 나가 가벼운 운동도 하고 꽃눈이 맺힌 나무들을 보며 안양천 길을 산책하다 문득 생각 난 장소에 가 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묻어둔 살구씨에서 싹이 돋았다.

이른 봄비가 대지를 몇 번 적신 후, 작은 바위 앞에 뾰롯이 솟아난 살구나무를 본 건 봄날의 환희였다.

 

그랬었구나! 차가운 땅속에서 깨어날 준비를 했던

그 딱딱한 껍데기 속 (행인은 납작한 심장 모양을 이루며, 윗부분은 뾰족하고 아랫부분은 둔하며 좌우가 균등하지 않다. 길이가 약 1.5㎝, 폭이 1.2㎝이고, 겉은 적갈색을 띤 얇은 껍질로 싸여 있고 가로로 된 쭈글쭈글한 무늬가 있어 쉽게 벗겨진다. 그 속에 흰색의 배태(胚胎)가 있다)

이것은 생명을 품고 있는 근거로 적절한 환경이 되면 발아한다.

 

 나이 들면서 고향을 생각하면 살구꽃이 먼저 떠 오르는 건 소싯적에 각인된 기억 저장고에서 발현되는 심상의 일들이다.

살구나무와의 친숙함은 고향 집 뒤꼍에 봄이면 환하게 피어나던 꽃을 보아왔던 봄날의 따뜻했던 기억과 억새 (초가) 지붕 위로 날리던 현란한 낙화의 분분함이 눈처럼 쌓인  장독대에 고망쥐처럼 들락날락하던 아련한 그 시절이 어린 내 정서를 키웠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뒤꼍 대숲도, 살구나무도 사라진지 오래다. 집터엔 외지 사람이 들어와 번듯한 집 짓고 사는데 내게는 아직도 60여 년 전 그 풍경들이 푸르게 살아온다.

꽃이 피는 것에 마음이 실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생의 후반기는 풍요롭다.

이제 그 자리에 뿌리 내린 나무가 꽃을 달 쯤이면 또 누군가가 꽃 보며 추억을 떠 올릴지 모르겠다.

그 정서를 찾아주는 살구나무가 잘 자라준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래서 기다려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2024년 봄/소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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