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드는 집/20호/소순희작/대한민국회화제 출품작>
내가, 남해나 정선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의 호젓한 언덕 아래로 보이는 따뜻한 마을과,강원의 골깊은 산아래 나지막이 엎드린 산가의 소박함 때문이다.
강릉행 밤 기차의 한 줄기 빛에 11월의 어둠은 길을 터 준다. 먼 촌락의 불빛이 하나 둘 어둠에 묻히면 긴 외마디 기적도 울리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산 골골을 휘어져 돌아가는 늙은 자벌레의 몸통처럼
길게 늘어진 열차의 느린 행보뿐이다. 희미한 실내등과 맞물리는 청남빛 하늘의 부우연 빛깔 아래 그렇게 새벽은 오는 것이고 사람들은 또 하루를 맞는 것이다.
규칙적으로 철거덕 거리는 쇠바퀴 소리와 선로의 마찰음의 가수면 상태의 여행객에겐 그나마도 자연 속으로 떠남이라 정겹다.
증산역에서 정선 구절리행으로 바꿔 타는 새벽의 찬 바람 속에 색다른 광경이 또 다른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았던가! 3량의 열차는 조는 듯 어둠을 가르고 별어곡,선평, 정선,여량,구절리로 향한다.
여량의 작은 역에 내리자 검은 산 하나가 실루엣처럼 앞을 가로막고 선다.
산 위로 또렷한 초록별 하나가 새벽의 청량한 공기 속에 얼어 있음이 이곳은 겨울이 먼저 자리를 틀고
앉아 있는 듯하다. 밤이 지난 새벽 손님에 귀찮은지 방을 내어주는 주인의 신발 끄는 소리와 곰팡내 나던 그 여인숙의 하룻밤도 산촌이라는 정겨움으로 후하게 마음이 접히는 일종의 위안이다.
여량의 자연도 어느 곳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슬픈 전설이 감도는 아우라지 강의 처녀 상과 작은 줄 배로 건너는 폭 좁은 여울목과 깨끗한 물의 순환만이 그곳의 특징일 것이다.
정선읍으로 들어서면 먼저 읍내를 끼고 반원을 그리는 조양강이 고즈넉이 흐른다. 예부터 배산임수형의 명당을 터로 잡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그곳에 마을이 형성되고 장이 서면서 번창하기 마련이다.
뒷마당에 유난히 키가 큰 모란이 엉성한 가지를 튼실하게 벋고 있는 식당 집에서 장국 칼국수로 얼큰한 점심을 해결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보는데 오래된 가옥 한 채가 고풍스런 모양새로 읍 중앙에 버티고 있다. 기웃기웃 집안을 들여다보니 한 촌노가 마당에서 풀을 뽑고있다.
누구의 고택인지는 모르나 참, 오래된 집이다. 이곳에서 몇 대의 자손들이 태어나 살길 찾아 떠났으리라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집은 늘 이렇게 사람들의 육적 정서를 키워오지 않았는가. 집안을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몇 장의 스케치를 하는 동안 집주인은 아무 말이 없다. 집 앞의 늙은 오동나무가 볕 좋은 오후 그림자를 길게 뻗어 늘어선 그 집! 따뜻한 11월 오후다.
세월가면 이 땅의 피조물과 그들이 만들어낸 생활수단의 방식들은 사위고 헐리고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지않던가! 더 편리한 현대의 것으로 추구함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닌데, 근래에 그곳에 가보니 헐리고 없는 그 집, 하긴 10여 년 전 이니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예사롭진 않다. 이제 그림으로 부활하여 숨어 버린 국한된 장소에서 체면 유지나 되지 않을까 안쓰럽다.
누군가 말했듯이 왕가의 법도 민초들의 법도 동일하게 흐르고 햇볕과 공기도 동일한 은혜로 받는데
무엇이 두려워 삶이 피폐해지도록 물욕으로 끌어안는 것일까.
2007/소순희 그림이야기-볕드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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