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책 길10호/1991소순희작>
창밖이 유난히 밝은 겨울 날은 여과없이 내려 쌓이는 눈의 흰빛 때문이다.1991년겨울 아침, 나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안양 비산동 어딘가에 내려 발자국 하나 찍혀있지 않은 설원을 쏘다녔다. 산 너머에서 해가 오르고 순백의 적설에서 반사되는 빛으로 눈이 부셨다.
적절한 구도를 찾아 헤매는 어느 한적한 산길에서 아직 빛바랜 잎새를 달고있는 떡갈나무숲의 따스한 색채와 눈의 흰빛과 푸른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대각선 구도는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신발속은 눈이녹아 젖은 발이 무감각해졌다. 누군가 가볍게 산책을 했을 굽어도는 산길 호젖한 밭머리로 사철 바람이
싱그러웠을 것이다. 나는 그날 첫 발자국을 남기며 한나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해 나는 작업실이 없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충만 했다가 사라지곤 했다. 중고등학교 미술강사로 만9년동안 생활 하면서 학교 미술실을 사용했는데 교장실로 변경하는 바람에 강당 한 구석으로 쫏겨났고 다시 그곳도 비워야 하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끝내는 세들어 사는 주인집 지하 창고에 그림을 보관 하고 목우회 공모전에 그림을 출품하기위해 계단 밑에서 아침과 저녁 자투리시간에 100호 그림 2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대미술관에 출품한 그림2점이 허망하게 낙선됐다. 서러웠다. 낙선의 쓴잔은 내게 약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기가 생겼다. 서러운 만큼 박박 지워버리는 쾌감도 있었다.
빠렛트가 굳어가고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을 무렵 주인집 아주머가 나의 그러함을 보고 옥탑방을 내어주었다. 나는 그곳 에서 미완성의 겨울그림을 완성했다. 돌아보면 참 어려웠던 시절이다.독산동381-39번지 한 집에서 14년을 살았다.그 어려웠던 한 때 그 열정과 고뇌의 날은 내가 나태해지려하면 그때를 되돌아보게하는 길잡이 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주인집 아주머니와 묵묵히 잘 참아준 아내가 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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