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때면
소순희
내게도 소상히 알고 있는 서럽고도 고운 추억 하나 가슴에 남아
해마다 이때 쯤이면 소롯이 살아와 마음을 적셔준다.
어머니와 큰 누님이 아버지 대신 논밭으로 나가 별바라기가 되어 돌아오고
내 중학 시절 마지막 여름은 먹장구름 한 장 떠오지 않고 맨 하늘에 가뭄만 계속되었다.
쟁기로 갈아엎어 놓은 논에선 푸석푸석 흙먼지가 일었고 독새풀이 무수히 움을 틔우고 있었다.
논밭을 묵히는 건 농부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었을까,
어머니는 세상 근심 다 짊어진 얼굴을 하고 끝내 모내기를 하지 못한 산 옆 가랫들 논에
모 대신 구황 작물인 메밀을 심었다.
물길 좋은 들녘에서는 벼들이 고개를 숙일 즈음 천수답인 우리 논엔
눈 시리도록 허연 메밀꽃이 유달리 고왔고, 늦여름 더위 속
꽃이 만발한 고랑 사이에 앉아 숨어들면
꼭 가슴께 그 높이에서 흐드러지게 꽃이 쌀밥처럼 터지고 있었다.
쌀 한 톨이 더 귀한 그때 나는 어머니와 누님의 근심이나 아픔도 모른 채
마냥 흐뭇해했다.
붉은 꽃대궁이와 하얀 꽃과 파란 잎과 나폴 거리던 흰 나비 떼들이
참 곱다고 생각했던 건 우리 식구들 중 나만 갖는 유일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해질녘 이면 서늘 하도록 흰 꽃이 더욱 선연히 눈에 들었고
사람들은 위로인 양 아무런 말도 없이 메밀밭 길을 지나가곤 했다.
그해 겨울 큰 누님은 산 너머 운봉(雲峰)으로 울면서 시집을 갔고
나는 몹시도 외로워지며 부쩍 말수가 줄었다.
사춘기가 왔던 걸까, 어머니의 잔소리는 더욱 늘어났고 그게 몹시도 싫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삶과 존재를 자연속에서 찾으려는
비교적 긍정적 사고로 산이며 들을 쏘다녔다.
다행히도 그런 자연 환경이 단순하고 소극적인 나에게 감성을 심어주고
조금씩 식견이 자라게 했던 교육장이었던 셈이다.
지금 와 생각하면 예술가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 앞에
내가 순연히 동화 되었고 그분의 섭리에 고개를 숙였을 뿐인데
인간의 본질적 이기심을 다스리는 말 없는 스승이었음을 상고해 본다..
나는 이런 고향과 산 아래 삶과 산에 엉겨있는 한 때의 삶과 추억이 있음으로
나에겐 참 축복 받은 일이다.
"모르고 볼 때는 내 인생과 별 인연 없는 땅 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땅으로 가슴 깊이 다가온다."는 어느 분의 말씀처럼 나도 그렇게
이 땅 구석구석을 발과 가슴으로 누려보고 싶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