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끝
소순희
아랫들 논은 마을 앞을 지나 작은 도랑을 따라가다 뒷산 자락의 끝을 끼고 돌아가면 산 밑 후미진 곳에
몇 다랑이의 논이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척박한 땅이지만, 영호 아부지는 그 논을 애지중지 아끼고 가꿨다.
물길 좋은 들 논을 갖지 못한 영호 아버지는 누렇게 벼가 익어가면 먼 곳 들논을 바라보며 부러움과
서러움이 뒤섞인 한 서린 몇 마디의 탄식조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그렇게 몇 해의 가을이 찾아오고 아들 영호가 초등학교 오학년 가을 부지깽이도 덤빈다는 농번기가 시작되었다.
괭이 발이라도 빌리고 싶은 바쁜 철이라 학교에선 부모님 일손을 도우라고 일주일 농번기 방학을 주어
베어 말려 놓은 볏단을 집으로 져 날으는 날이다. 마을 앞 길보다 지름길인 산길은 비탈지고 좁지만
그래도 그길이 마음 편한 길이다. 열두 살 영호에게 얼추 맞는 지게가 있어 아버지와 볏단을 져 날으는
하루의 가을볕은 따갑고, 축 늘어진 벼이삭이 걸을 때마다 출렁거렸다.
이마에선 삐적삐적 땀이 배어 나와 흐르면 눈이 따가웠지만 주먹으로 쓸어내며 산길을 오르면 길 아래쪽
대밭에선 참새떼가 요란하게 짖어댔다. 영호는 마당에 볏단을 부려 놓고 한 바가지 냉수를 들이켰다.
잠시 마루에 걸터앉아 벌겋게 부어오른 어깨를 만져보니 쓰라렸지만, 다시 지게를 지고 힘든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고 내색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좁은 산길에서 아버지가 볏단에 묻혀 겨우 눈만 보인 채
끄덕끄덕 산길을 오고 있었다. 엇갈린 영호에게 "아가, 힘들제 시나브로 헤라 잉" 하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힘들게 하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농사꾼 자식은 어릴 때 부터 일을 배워야한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그 길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가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땀이 걷히면서
땀에 젖은 몸이 한기가 들었다. 이때 쯤이면 여기저기 논이 비어가고 검게 갈아 엎어 놓은 논엔
보리 파종이 시작됐다. 소작농인 영호네 논도 보리 파종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논을 비워야한다.
마당에 쌓인 볏단을 보고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안쓰러운지 영호의 머리에 붙은 검불을 떼어주며
"힘들제? 쯧쯧 에린 것이 참말로 애씬다 잉"하며 정지에 들어가 점심을 차려 내온다.
저녁때는 조금 남은 볏단을 지고 오면 오늘 일은 끝이다. 내일은 마당 가운데 벼 낱가리를 만들어야한다.
점심 후 아버지가 먼저 논으로 가고 영호는 좀 쉬다 잿논을 지나 대밭길에 이르렀을 때 중학생인
일두형과 평호형이 영호를 불러 세웠다.
"야. 너 쩌어그 대밭에 감나무 보이제 " 대밭 가장자리에 굵은 감나무에 노랗고 빨갛게 익어가는 감이
먹음직스럽게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우리가 망볼 테니깐 저 감 좀 따와! 잉"
"안되 , 형 나 논에 가야되"
"이 새끼가 말을 안 듣네." 하면서 일두형이 가지고 있던 막대기로 머리통을 딱딱 때렸다.
한쪽 눈이 감길정도로 머리통이 핑 돈다. 그러쟎아도 친구들과 달리 모여 놀지도 못하는 영호는
서러움에 끄억끄억 울음을 삼키느라 머리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야, 그만 가자하고 평호 형이
일두 형을 잡아끌자 머리통을 한 대 더 툭 치고 침을 이빨 사이로 찍 쏘아대며 산 아래로 사라져 갔다.
지게를 진 채 언덕길에 앉아 한 참을 울고나니 눈가에 때꼬장물이 말라 붙고 더욱 쓰라렸다.
마을에서 어린 동생들을 괴롭히고 여름엔 시냈가에서 멱을 감을 때면 물속에 처 넣기까지 별별
못 된 짓을 다하고 다녔다.
어느 해 여름 영호 친구 춘식이가 둥지에서 떨어진 왜가리 새끼를 안고와
개구리며 물고기를 잡아 먹이며 기르게 되었다. 새끼 티를 벗어난 왜가리는 곧잘 마당을 뛰어다니며
춘식이를 잘 따랐다. 그날도 개구리를 잡아 집으로 왔는데 왜가리가 마당 구석에 널부러진 채 죽어 있었다.
춘식이는 죽은 왜가리를 안고 목이쉬도록 울었다.
"오빠야, 울지마" 춘식이 여동생 민숙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일두 오빠가 마룽 밑에 있는 농약을 멕여 죽였어" 춘식이 아버지가 논에 뿌리고 남은 농약을
비료 포대 안에 넣어둔 걸 꺼내 그 짓을하고 간 일두를 향해 춘식이는 외마디 비명처럼 외쳤다.
"개새끼!" 그러나 따질 수도 없는 것은 일두의 성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일두는 형 또래들보다 덩치도 크고 꺼무튀튀한 둥근 얼굴에 곁눈질로 쏘아 볼 때면
흰자위가 유난히 드러나는 게 볼썽사나웠다. 항상 입 가장자리는 마른 침이 허옇게 붙어 있는 입꼬리가
비웃 듯 치켜 올라가 있다. 이마는 좁고 일자로 깎은 머리가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마을 어린아이들은 일두만 보면 슬슬 피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시골은 겨울 한 철이 젤 한가한 때이고 쉼을 얻는 계절이다. 가끔 뒷산에 가서 땔 나무를 해오면
겨울 긴 하루도 저물고 겨을 방학 내내 친구들과 모여 신나게 놀 수 있었다.
일두 동생인 성두는 영호와 한 반이라 둘은 잘 어울려 놀았다. 일두와 달리 소심한 성두는
남을 괴롭히거나 싸움은 하지 않지만, 고집과 욕심은 유달리 남달랐다. 그래도 잘 어울려 노는 걸 보면
한 뱃속에서 나와도 저리 다를 수가 있구나하고 어른들은 성두를 보면서 속닥거리곤 했다.
그해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 온 산이 하얗게 덮였다.
"아따,눈이 몸썰나게 많이도 와부네" 마실가는 아주머니가 웅크리고 가며 한 마디 내 뱉았다.
마을 형들은 눈이오면 토끼사냥을 가곤 했다. 발자국을 따라가면 언덕 밑 굴에서 낮잠을 자다 사람들 소리에
잠 깬 토끼는 귀를 쫑긋 세우고 내달렸다. 쫓기는 토끼 길목에 철사로 만든 올가미를 놓고
발자국을 따라가면서 쫓으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토끼는 목이 걸려 버둥거리다 죽어갔다.
그 영역이 좁은 토끼의 반경은 한 골짜기를 넘지 못했다.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토끼는 참, 불쌍한
산에서 가장 연약한 짐승이다.
양지 녘엔 눈이 녹고 포근한 겨울날 무료해서 성두와 잿논이 있는 야산에 올랐다.
시골 아이들의 허름한 겨울옷은 그다지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다. 묽은 콧물이 흘러내리면 훅 빨아들이거나
옷 소매로 쓱 닦아내면 콧물 마른 자국이 허옇게 남았고 옷 소매끝은 검다 못해 반들거렸다.
여기저기 산을 돌아다니는데 성두가 죽은 꿩을 두마리를 주웠다. 다복솔 밑 덜 녹은 눈위에 장끼가
눈을 반쯤 뜬 채 누워 있었고 눈물을 흘렸는 눈가가 젖어 있었다. 한 마리는 그곳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저랬을까. 성두의 손엔 거꾸로 다리를 쳐든
장끼 두마리가 들려 있었다. 볼이 붉으락 푸르락한 빛깔이 겨울 햇볕에 신비롭게 흐른다.
긴 꼬리는 얼룩얼룩 멋지게 뻗어 있었다.
"성두야, 나 한 마리만 줘 응. 넌 두 마리쟎여 응"
"호록...." 코를 훌쩍이는 모습이 싫다는 모습이다.
"나랑 같이 왔응께 한 마리 줘 응!"
"안되, 우리 형이 어저께 청산가리든 콩을 여기 뿌려 놨다고 했어"
욕심 많은 성두는 끝내 꿩 두 마리를 들고 산을 내려가버렸다.
영호는 어디 더 죽어 있을 꿩을 찾는데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괜히 산을 헤매다 못내 안타까워하며 산을 내려왔다.
영호는 나도 꿩 한 마리 들고 집에 가면 어머니가 좋아할 텐데, 하지만 그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영호의 마음 속에서만 맴도는 서운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에선 쉽사리 고기를 사 먹지 못 할 때이니 얼마나 귀한 것이었으랴.
어른들은 겨울이면 꿩을 잡는다고 사랑방에 모여 노란 메주콩을 파내고 그곳에 하얀 청산가리를 넣고
촛농으로 구멍을 막았다. 청산가리를 싸이나라고도 하는 하얀색의 둥근 물질로 도금, 금 제련, 분석시약, 염료 제조등에
쓰이는 공업용 물질이지만, 극약으로 가끔 자살하는 사람 몸에서 검출 되었다고 발표한 일이 있었다.
일두도 그것을 어른들 어깨너머로 보고 배워 하얀 종이에 싸 숨겨둔 청산가리를 훔쳐 몰래 만든 콩을 산옆 잿논가에
꿩이 많이 온다는 걸 알고 거기 뿌려 뒀던 것이다.
"아부지, 나 산에서 꿩 줏어 왔네"
"어허! 참 튼실하게 생겼구나, 야 일두야 꿩 좀 씻어 오이라 잉" 일두 아버지는 나뭇단을 안고 뒤란으로 가면서
일두에게 부탁했다. 일두는 방에서 나와 털을 뽑고 따뜻한 물을 끓여 도랑으로 가서 배를 갈랐다.
칼 날이 지나가자 붉은 빛이 도는 살이 벌어지며 푸르딩딩한 내장이 우글우글 드러났다.
성두는 형의 꿩 다루는 솜씨가 용하다고 생각하는데 간을 떼어 내더니 찬 물에 두어번 헹군 다음 날간을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성두야 너도 묵을려?"
상을 찌뿌리며 "쌩간을 어특게 묵어 형!"
"싫으면 괜두고, 우웅 맛있다. 고소한데 하, 이 맛! " 예의 그 흰자위가 유난히 드러나며 웃음을 흘린다.
일두네 집 굴뚝에선 그날 저녁 연기가 오래도록 솟아 올랐다.
그리고 다음 날 마을엔 흉흉한 소문이 나 돌았다
"아, 금메 잉 일두가 갑재기 숨을 못 쉬고 파래지더랴. 그레서 택시 불러서 읍내 벵원으로 실려갔당마."
"왜 그랬댜?"
"몰라, 옆집 아재 말에 의하면 어저께 산에서 성두가 꿩을 줏어 왔는디 그걸 묵고 그랬다나벼"
"지랄"
"다른 사람은 괜 찮은가벼 아, 글씨 고 놈이 죽은 꿩 쌩간을 묵고 그랬댜"
꿩이 먹은 콩 속 청산가리가 꿩의 내장에 퍼진 걸 모르고 내장의 일부를 먹은 탓이었다.
그 후로 일두는 마을에서 보이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가 며칠을 두고 계속되면서 마을이 적막 속에 묻혀 고즈넉했다.
다만 일두네 집에선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간간히 흘러나왔다.
영호는 온종일 뭔지모를 허전함에 괜시리 산에 올라 걷고 있는데 먼 곳에서 끄엉끄엉 산 메아리로 꿩 울음이 들려왔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