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부류와 다시 내려올 산을 뭐하려고 가느냐 반문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나름의 삶의 방식이겠지만 산을 올라보지 않고는 그 깊이와 높이와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없습니다.
미명은 아직 밝아 올 수 있다는 것이 설렘입니다.
노고단 고개를 넘는 새벽 어스름에도 나무는 안개를 머금고 바람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숱한 산악인들의
발자취가 남은 그 오솔길로 나 또한 아니 온 듯 지나갑니다. 사철 다른 의미로 풍경을 만들어 내는 섭리에
굳은 마음에도 감탄의 연속으로 나눔을 가집니다.
너무 찬란한 가을 숲보다는 곰삭은 색채의 은은함이 좋은 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공통분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피어린 지리산의 일우에 내가 숨어 숲길을 걷는다는 것에, 가을 어느 날 추억의 밑줄을 긋습니다.
수십 여 년 전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이념이 나뉜 격전지에서 생사의 끝을 모른채 내 달리던 긴박한 날은
이미 먼 뒤안길로 접어든지 오래지만, 이제는 그날의 총성이나 초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잘 채색된 풍경에
마음을 내맡긴 하루였습니다.
피의 격전지로 유명한 피아골 전투에서 산화한 갓 고향 떠난 젊은 영혼들의 발길이 머물렀을 산길에서 그들의
맑은 웃음소리라도 들릴 듯 이제는 평화와 연인들의 형형색색 옷이 더 붉습니다. 종일 대치하고 쫓고 쫓기는
긴장 속에 그 맑은 물에 얼굴을 비춰보며 부모 형제를 떠 올렸을 서로의 마음은 같았을 겁니다.
수통에 물을 채우며 이 물을 다 마시기 전에 죽음이 오지 않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러나 그들이 지켜 낸 조국의 가을을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음에 감사치 않을 수 없습니다.
J,
이 가을은 당신에게 있어 해마다 겪는 계절이지만 나이 듦의 한 뜻이 새겨지기를 바라옵니다.
그리운이여 안녕~
2008/10/소순희
<노고단 고개의 새벽/10월>
<반야봉이 보이는 곳에서>
<피아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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