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을 놓으며
형, 지상에서 가장 그리운 것들
다 스러지도록 들불을 놓자
우리의 손톱 닳던 자갈밭 너머로
시월을 넘기며 눈물짓던 유년의 하늘
가득히 고운 연기를 피워 올리자
스러지는 풀과 풀들의 가슴 높이로
우리도 함께 묻히고
타오르는 불꽃이 되면
아우성이던 가을 바람
그 해 가을 벌레 소리를
흩어 버리고 흐르지
불모지 위로 저녁놀 지면
빈 하늘은 덧없이 슬퍼
그 가을 저녁 하늘로
따숩게 들불을 피워 올리자
우리 한기 드는 가슴에 신명나던 들불
온 벌판은 휘모리 한마당 이었지
거기 나직이 불러보는 이름 다시 재가되고
저녁 새 무리 자옥히 풀려가는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건
형, 언젠가 부끄럽게 그리워 했던 모든 것
재가되며 타오르는 들불이지.
87.소순희
우리 가슴 높이까지 자라던 풀밭 속에 보금자리를 틀고 종달새와 할미새는
알을 품고 새끼를 길러냈다. 그리고 가을이오면 그 모든 것들이 다시 재가되는
순리로 돌아갔다. 그 유년의 부끄럽게 그리워했던 이름까지도...
(네팔의 소녀 .소순희작3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