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산중의 가을은 깊이모를 고즈넉함에 저리도 속히 가을이 임하는 까닭을 알듯도 합니다. 여름 내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햇볕을 헛되이 버릴 수 없다는 걸 아는게 살면서 터특한 지혜에 불과하지만 농부는 바람결이 다른 것으로 이미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의 끝을 붙잡고 호박꽂이며 가지말리기, 무청말리기와 고추말리기등의 갈무리에 여념이 없습니다. 딴은 유실수와 다른 밭작물이 시절을 먼저 읽고 튼실한 종족의 성숙을위해 하늘로 머리를 들어 마지막 여름볕을 받습니다. 이틀만 더 남국의 볕을 달라던 시인의 마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
J. 손을 움켜 퍼 마시던 개울물도 이제는 차가움에 손 담그기가 꺼려집니다. 개울물이 날로 투명해지는 때는 가을부터 얼음장밑의 겨울 끝트머리 까지라는 걸 느끼기에 다시 한 번 물을 움켜 들이킵니다. 이렇듯 산중의 가을은 서럽도록 짧은 시간을 허락한 채 산 너머로 이울고 마는 하루해가 아쉽습니다.
J. 마른 옥수수 대궁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와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정선의 밤은 깊어갑니다. 저녁무렵에 눈 앞에 웅크린 1014m의 웅봉(熊峰)이 안개를 피워 올리더니 밤엔 비를 몰아옵니다.무질서하지만 고운 리듬으로 지붕을 토닥거리는 가을비 소리를 듣노니 나는 진정 행복에 젖어 문을 열고 밤 바람을 맞습니다. 가끔은 도회지 생활에 지친 영혼의 쉼터로 며칠간이지만 꿈같은 날이 가뭇없이 가고 말지라도 물소리와 산 비알에 내리는 가을볕을 새 식구로 끌어들여 봅니다. 올해는 유난히 개울가 앞마당에 복숭아 나무가 많은 열매를 달고 서있습니다. 농익은 각시복숭아를 한 소쿠리 따서 개울물에 씻어 먹습니다. 적당히 무른 속살의 부드러움과 은은한 향이 입 안 가득 고여옵니다. 개량된 신품종도 아니고 크기도 살구보다 조금 큰 각시 복숭아는 누군가 먹고 던져버린 씨앗이 자연 발아된 울타리가의 귀한 꽃나무로 커 온 것입니다.
J. 내 유년엔 휴억(빈지게)님과 거의 살다시피 한 나날이었고 우리들은 온갖 장난이며 서리며. 어르신들 주무시는 사랑방 잠 자리에 끼어 자곤했습니다. 마당끝엔 늙은 각시 복숭아나무가 개울에 가지를 드리운 채 봄이면 분홍빛 꽃을 피워 하늘로 오르곤 했습니다. 그 개울가로 난 좁은 길로 사계절이 바뀌며 수년 동안 학교를 다녔고 봄엔 복숭아 꽃잎이 물위에 지는 걸 보며 참,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랗빛 오동꽃에서 싸한 향기가 퍼지고 복분자가 익던 여름엔 그 개울창에 들어서면 서늘하도록 땀이 걷혔습니다. 가을엔 으름덩굴에 달린 으름도 따먹고 훤히 보이는 물속에 중고기를 잡아 닭에게 던져주곤했습니다. 겨울엔 얼어붙은 개울에서 이듬해 봄까지 썰매를 타고 놀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나는 각시복숭아의 맛을 잊지 못 합니다.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기도 했지만 새 각시 뺨처럼 붉은 그 복숭아의 참 맛을 지금와서 찾을 길은 없고 고모(빈지게님의)가 따 주시던 그 맛은 신품종에선 찾을 수 없습니다.
J 이제는 그 추억을 먹고 사는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허나, 세월흘러 온갖 것 다 변해도 마음속 그 아름다운 것들은 물주고 햇볕나면 언제든 발아하는 까닭에 외롭지 않습니다. 이 가을이 당신에게도 풍요롭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운이여 안녕 2005 9 소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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