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비내리는 진부에서 정선 방향으로 오대천 물길을 따라 내려 오면
산을 밀어 올리는 안개가 절제된 봉우리 몇개만 남겨 둔 채 깊이 숨겨 버린 까닭을
알 듯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어느 화가의 역 원근법이 비로소 현실이 되어
눈 앞에 정경으로 풀어지는 산과 비에 젖은 풋 것들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제풀에 겨운 물소리도 온 산골짜기를 바람처럼 누비고 벙어리 같은 마을이
숲가에 고스란히 떠 오르면 나즈막한 세 칸 짜리 집이 빗속에 아련합니다.
저 빛 바래고 녹슨 붉은 양철지붕 아래 어느 좋은 한 때를 보자고 비탈 밭을 일구는
농부의 한 평생이 삶의 질곡으로 측은 한데 낮 뻐꾸기는 빗속에서 온종일 구슬프게
메아리를 만들어 냅니다.
J
풍문처럼 떠돌던 옛이야기도 이젠 조바심쳐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그것들이 고전이 되어버린
연담의 한 편 일뿐입니다.
너와지붕 아래 작은 문을 열고 바라보면 큰 산 하나를 옮겨 놓은 풍경은
허리 굽어 가엾은 노인 하나가 실 같은 길을 끌고 그림속으로 사라져갑니다.
나는 차 속에서 앞유리창을 흘러 내리는 빗물을 닦지않고 가만히 놓아둡니다.
굴절 되어 흐르는 그리움도 함께 젖어 산 속에 묻히는 걸, 아! 난들 어찌합니까.
무심한 새 몇 마리가 빗속으로 날아가고 나는 창밖으로 손을 뻗어 비를 받아봅니다.
묵묵부답으로 멈춰선 빗방울에 손을 적셔봄이 부질없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올려다 본 잣나무숲에 별이 열리는 어느 가을을 걸어보고픈 꿈을 꿉니다.
J,산굽이를 돌아 북평 어디메쯤을 내려 오면 산 아래로 흰 옥양목을 펼쳐 놓은 듯한 폭포가
푸르름속에 수줍은듯 그 자태를 들어냅니다.
지도를 펼쳐보면 1170고지의 백석산에서 발원하여 산계곡을 흘러 마침내 다다른
산의 끝자락에 116m의 80도 경사를이루어 흰 물살로 미끄러져 내리는 장관에 길 가는
나그네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 매력에 빠져듭니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라고 읊조리던 시인의 마음을 읽습니다.
높이 116m 백석폭포
다시, 나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조양강을 끼고 거슬러 올라가면 노추산에서부터 구절리를 휘감고 내려오는 송천과 여량의 골지천이 합류하는데 이곳을 아우라지라고 합니다.
10 여년전 새벽 기차에서 내리자 앞을 가로막고 선, 검은 새벽 산 하나가 별을 이고 서있던
여량의 인상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 합니다.
어렵사리 찾아든 여인숙의 곰팡내 나던 쓸쓸한 11월의 그 밤을 다시 그리워 하는지도 모릅니다.
홀로 선다는 것이 저으기 위안이 되었던 그 시절 참 서럽고 추웠지만 그 만큼 나를 지탱해준
여행 이었다고 이제와 고백 하건대 진정으로 외로워 본 자만이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쇠줄을 당겨 강을 건너는 나룻배의 뱃사공 촌노는 간 곳 없고 유명세를 탄 관광지라
외지인의 발길이 심심찮게 거쳐 가지만 잘 정돈 된 터라 볼 만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슬픈 전설을 안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처녀 동상이 내려다 보는 것으로 그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뿐 한 번의 발자취로 충분 합니다.
그 해 500원의 배삯을 주고 건넜는데 이젠 빈 배만 강가에 덩그라니 사진의 모델로 남아
짙푸른 여름날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J,
아우라지 전설은 오늘의 젊은 가슴들을 데워 주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강건너 싸리골 처녀와 여량 총각의 혼삿날 총각집으로 가려고 가족 친지들과 배를 타고 건너다
정원 초과로 강물에 휩쓸려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그 처녀와 마을 사람들의 비정은 그들만의
것이 되어 버린 듯 이제는 아무도 기억 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J.이제 왔던 길 돌아 가렵니다. 산이 그대로이듯 사는 날까지
마음 하나 곱게 가지고 살고 싶은 까닭은 내주(內住)해 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함입니다.
그리운이여 그러면 안녕.2005. 7월에 소순희
비내리던 날 함께 해주신 김부민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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