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J에게(13)-고향집을그리며...

소순희 2006. 6. 4. 01:10

 J,

환경이나 처지가 어떻든 목숨 자라 커 온 곳이 살아가는 귀중한 이유의 하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정신적 회귀의 유산으로 남겨진 것 중 고향은 늘

마음구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유년기와 외롭던 소년기를 겪으며 산과 나무와 더불어 감성이 자랐던

산 밑 1076번지 작은 집, 마당엔 오동나무와 감나무가 푸른 빛깔을 한 아름씩 쏟아내고

밤나무 숲에선 산비둘기가 가는 나뭇가지로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를 길러냈습니다.

유월이오면 온 마을이 밤꽃 향기에 싸이고 밤새도록 소쩍새 울음소리는 애간장을 태웠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그 울음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던  여름밤의 고요를 아시나요?

초저녁 하늘에선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남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초야에 묻혀 살다 소멸해간 내 이웃의 늙은 영혼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J,

꿈을 꾸었습니다.

스무 해까지 살아온 산밑의 작은집만 보입니다. 그 곳에 가서 방에 누워보면

뒷문 밖 장독대너머의 대밭도 여전히 싱그러운 푸른 바람소리를 풀어냈습니다.

아버지가 오수에 들면 나는 그 좁은 아버지 등 뒤 좁은 공간에서 노는 게 즐거웠었지요.

이젠 가신 아버지보다 내 나이가 많아진 지금에와서 나는 아이들에게 아부지처럼

그 든든한 등을 한 번만이라도 빌려주고싶은데 아이들은 이미

그럴 나이는 지나쳐 와 버렸습니다.

흰 회벽에 막 돋아 난 아기의 고운 이 같은 세로쓰기 연필글씨가 유일한 아버지의 흔적이었는데

비 바람에 다 떨어져 나간 흙벽의 아쉬움을 탓하며 나는 그것마저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게으름을 자책합니다.

98년 그 해 낡고 기울어진 집을 헐어버린 집터엔 추억만 무성합니다.

언젠가 아버지와 소죽 쑤던 그 아궁이 앞에서 고운 흙 한 줌을 퍼 왔습니다.

초라하고 가엾은 집이지만 그건 내게 남은 고향집의 체온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그리운이여 안녕 소순희

 

 

1994년여름 빈 집

 

유월에/10호/소순희작/ 배반의이데올로기전출품작/미국 칼슨시소장

'엽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J에게(15)-시간  (0) 2006.07.14
J에게(14)-여름꽃  (0) 2006.07.02
J에게(12)-5월아침에...  (0) 2006.05.02
J에게(11)-꽃샘바람 속에서...  (0) 2006.03.12
J에게(10)-계절의 끝 즈음에서...  (0) 2006.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