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흐린 겨울 저녁, 나는 승객이 없는 요코스가발 상행선 2등 객실에 앉아있었다. 발차 기적이 울리자, 개찰구에서 요란한 나막신 소리와 역무원이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리더니 열서너 살쯤의
계집아이가 황급히 들어왔다. 퍼석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고, 온통 살갗이 튼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영락없는 시골뜨기였다. 더구나 커다란 보퉁이를 끌어안고 있는 동상 걸린 손에는 3등차표가 꼭 쥐어져 있었다. 나는 이 계집아이의 천박한 얼굴 생김새와 불결한 복장, 2등과 3등도 구별 못 하는 우둔함이 달갑지 않았다 .아이의 존재를 잊기위해 석간신문을 펼쳐들었지만 이내 꾸벅꾸벅 졸기시작했다.
얼마쯤 지난 뒤,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어느결에 아이가 내 곁으로 옮겨 앉아
창문을 열려고 애쓰고 있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 기차는 막 터널 입구로 들어가려 하는데 일부러 창문을 열려고 하는 아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냉혹한 눈길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는 동시에 창문이 열리고 말았다. 별안간 시커멓고 매캐한 연기가 물컥 객실 안으로 넘쳐흘러 숨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어두운
차창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고,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차츰 창밖이 밝아지면서 기차는 터널을 빠져나와 어느 외딴 마을의 건널목을 지나고 있었다.
건널목 근처에는 한결같이 초라한 초가집들이 너저분하게 세워져있었다. 그때 나는 건널목 울타리 너머에 사내아이 셋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일제히 손을 흔들면서 애처롭게 목청을 돋우어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던 계집아이가 손을 쫙 뻗어 세차게 좌우로 흔들더니, 포근한 담홍색으로 물든
귤 대여섯개가 사내아이들 머리위로 휙휙 날아가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남의집살이를 떠나는 계집아이의 품속에 간직해 온 귤 몇 개를 차창밖으로 던져, 건널복까지 배웅하러 나온 동생들과의 이별을 아쉬어 했던 것이다.
저물어 가는 외딴 마을의 건널목, 작은 새처럼 목청을 돋우던 세 아이 그리고 그 위로 뿌려지는 선명한 색의 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겨를없이 지나쳐 갔지만 내 마음속에는 안타까울 만큼 또렷이 그 광경이 찍혔으며, 거기로부터 어떤 알지 못할 쾌활한 기분이 샘 솟았다.
- 아쿠타카와류노스케-
중리가는 사잇길 100호 소순희작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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