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안양역사 수십 계단을 자전거를 끌고 오르는 모습이
엽기였을 법하다.
안양화실에서 역사를 가로지르면 집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역과 접한 백화점 앞에서 대학생인 아이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빠, 오늘 모임 있는데 용돈 좀 주세요." 화실로 전화가왔다.
언제부턴가 아이는 나와 가까워지지 않는 감정의 거리를 유지한 채 다소 사무적인
내용으로 접근해 오고 있던 걸 내심 서럽고도 내가 그렇게 만든 까닭에 가까이 하고픈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오늘도 지 필요에 의한 전화여서 조금은 짜증이 나면서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적은 돈이지만 마련하여 약속 장소로 나섰다.
막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때 얼굴을 휙 돌리며 못 본체 하는 아이의 옆 모습을 보면서
나를 창피하게 여기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장소도 장소이려니와
머리에 왁스를 발라 한 껏 멋을 낸 아이에겐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나는 부러 큰 소리로 "야, 아빠가 창피하냐?"라고 하자 "아, 아니예요."
아이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저기 가서 얘기해요 한다.
나는 터벅터벅 아이의 뒤를 따라가며 화가 났고 중얼중얼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역 끝에서 "얌마, 뭐가 그리 도 챙피하냐, 응?" "아니라니깐요... ,"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짜샤."
"빨리 돈 주세요."
반대편 역 계단을 내려가서 돈을 건네주자 아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계단을 오르고
나는, 나쁜 놈이라고 연방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면서 막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고있었다.
내가 화가 난 건 아이의 모습에서 예전의 나를 보는 심리적 상황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과
소극적인 감정이 투영된 것을 보기 때문이었으리라.
갓 결혼하고 어렵사리 신혼살림을 하고 있던 어느 해 어머니는 손수 농사지은 것과
냇가에서 잡아온 다슬기를 얼려 여러 개의 보따리를 꾸려 고속버스로 상경 하셨고
나는 마중가서 무거운 짐을 가져오며 어머니를 얼마나 마음 아프게 했는지 모른다.
"뭐하게 이런 걸 가지고 오셔요,그냥 오시쟎고...,"
"이눔아, 그레도 이 에미가 농사지어서 자식새끼 멕이려고 가꼬 온건디 니가 그러먼 쓰냐?"
"아, 글쎄 고생스럽게 이게 뭐요."
이건 순전히 어머니를 생각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촌스러운 보따리와
무거운 짐 때문이었었다는걸 고백한다.
"그려, 인제 안가꼬 올란다 잉."
그 이십 대 때 나의 자신감 결여와 어머니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으로 작용했던 그 몹쓸 짓들이
내게 그대로 전이 되어 오는 이 아픔을 나는 안다.
메뚜기 콧잔등보다 좁은 그 속을 좀 더 넓게 키워준 건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이란 걸
매 번 느끼면서 가끔은 왜 이렇게 이해의 폭이 좁은지 모르겠다.
지금은 오히려 어머니께서 지으신 텃밭의 곡식이 그립고 늙으신 어머니가 좋다.
내 아이도 나를 아버지라고 듬직하게 마음속 깊이 뿌리내릴 거라는 확신이 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세월 속에 묻어둔다.
그리고 요즘 이십대들의 보편적 삶에서 아이는 다른 면이 성실하고 착하다는 걸 모른바는 아니다.
2005.1.소순희
골목길 소순희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