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캔바스 위의 날들)

그림이야기(11)-버려진 것들 그리고 생명

소순희 2010. 1. 9. 00:39


                               

         <버려진 것들 그리고 생명> 100호P(162.2 X112Cm) 소순희 작1994년 대한민국미술대전작>

 

      겨울 스케치

 

그해 겨울 무작정 마음 내킨 대로 떠나  홍천 모곡을 온 종일 걸었다.

구둣발로 쏘다니다 지친 발의 인대 이완으로 그 후 달포 쯤을 몹시도 힘 든 날 이었다.

나무들은  심어진 자리에서  옮겨 지지 않은 채 양지 바른 남향받이 땅을 탐내지 않고

그렇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다.

겨울날의 짧은 해를 가지에 걸어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정미소 앞 느티나무에선

참새란 놈들이 포로롱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길손의 출현을 경계하는

겨울 오후가 적당히 나른함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홍천강은 초록으로 물든 긴 허리를 산 아래로 뉘여 흐르고 나는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백사장 주변의 포플러 나무 흰 가지가 몹시도 깨끗하다고 느끼며 머릿속에 그 빛깔과

속력감 있는 가지를 그려 넣고 있었다.

 

 

4~5학년 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학교 앞 주변에서 휴지를 줍고 있었다.

아이들을 인솔하는 갓 부임했을지 모를 얼굴이 하얀 초등학교 여선생님의 앳된 모습이 참 예뻤다.

살면서 저런 모습들을 많이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차곡차곡 담아 두었었다.

 

 

한 때 애니미즘에 쏠린 적이있었다.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원시종교의 한 부분으로 쓰는 물건에도 넋이 옮겨사는 것이라는 것에 부정하고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손때 묻은 도구에도 친구나 가족같이 아껴주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 결코 나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쓰다가 버린 물건 야적장의 틈새에서 이름모를 꽃이 피어나고 저들끼리 정답게 얘기를 나누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그날도 홍천에 다녀 온지 며칠이 지났건만 여전히 발이 아파 절룩거리며 우면산 기슭 사당동 변두리를 헤매며 그림 소재를 찾고 있는데 잔설 속에 타이어가 쌓여 있고 그 사이 푸른 싹이 돋는 걸 어쩌랴. 나는 보았다. 모든 것 겨울 깊이 숨어 들어 쉼 얻을 때 그 언 땅에 뿌리를 박는 생명! 그 환희, 그 아픈 열정.

눈속에서 겨울 이기는 푸른 생명을 보아라. 나도 저처럼 이땅의 서름 이기고 굳건히 서리라고...

 

                                                                                                       소순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