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3학년 봄

소순희 2003. 10. 9. 00:34

등교하는 자유를 갉아먹던 향토애향단이라는 깃발아래 아이들이 모였다.
제비새끼처럼 입을 모아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며 줄을 맞추어 학교로 가던 참 웃기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토예비군의 노래,승리의 노래, 월남파병의 노래, 새마을 노래등등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단장이라는 아이는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슬푸른 정권 아래서 오죽했으랴...

학교가는 길은 마을을 벗어나 논길로 독밭거리를 중심으로 꺽어 1Km는 족히 되었다.
그 논길로 육년을 다녔으니 어디쯤 무슨 풀꽃이 피는지 훤히 알았고 사계의 변화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익혔다.
보리가 피기 직전 청보릿잎에서 나던 물큰한 풀냄새를 맡으며 후덥한 기운에 쌓인 길을 책보자기를 어깨에 두른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처럼 보리밭 문둥이 이야기로 어린 마음을 빼앗아 버렸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속이고 얼마나 즐거워 했을까.
혹 혼자 돌아오던 길에 일하는 농부를 보고 겁에 질려 논둑밑을 살금살금 기다가 하얀 별모양의
무릇꽃을 발견하곤 거기 주저앉아 화려하지도,예쁘지도 않는 꽃에 매료되어 한참을 있었지만
간을 빼어 먹는다는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 아프고 슬픈 이야기이다.

하얀 지붕이 보이고 키 큰 미루나무가 운동장 가장자리로 둘러선 학교에선 땡 땡 땡 종소리가 아지랑이 속으로
곰실곰실 실려오곤했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논에 나가 일하던 때면 으례 그 종소리가 뭔지 모를 불안감을 안겨오곤 했다.

어떤 날은 돌아오는 길에 클로버(토끼풀)꽃이 동글동글 하얗게 피어있고 꿀벌들은 열심히 꽃을 옮겨가며 꿀을 모았다.
우리들은 심심하면 고무신을 벗어 꿀을 빠는 벌을 낚아채 빙빙 돌리다 땅에 팽개치면 고무신 속에서
가물가물 죽어가는 벌 꽁무니 독침을 빼고 허리를 띠어 꿀주머니안에 저장되어 있던 꿀을 빨아먹던 잔인한(?) 4월.
참 몹쓸짓을 했다.(회개했음)

보리가 피면 꼭 깜부기병에 걸린 검은 보리 이삭이 생겼다.남자아이들은 그것을 뽑아
등뒤에 감추고 여자아이들의 얼굴에 붓질하듯 스치면 검은 줄이 그어지고 영락없는 인디언 추장같은
모습으로 눈을 흘기며 울기도 했다.

노란 옥수수빵을 기억하는가... 김이 모락모락 나던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간식.
그 빵을 받아들면 마음은 항상 부자였다.옥수수빵을 둘로 나눠 한쪽은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집으로 오며 나는
집에 있는 여동생이 맛나게 먹을 것을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씩 떼어먹고 오면 주머니속의 빵은 동그랗게 되기 일쑤였고 실밥이며 먼지가 묻어나곤했다.
그나마 맛있게 받아먹던 동생의 입모양을 보며 나는 흐뭇해했다.나는 지금도 빵을 좋아하지만
그 때 그 간식인 노란 옥수수빵처럼 맛이 나지 않는건 시절의 무상함일까...그.립.다.


개인전(조형갤러리) 소순희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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