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소순희는 여자가 아니란게 증명됐다.

소순희 2004. 9. 8. 02:19

"옷 벗어"

"안돼요, 선생님.운동복 안 입었단 말이에요."

"거추장스러워서 어디 뛸 수 있겠어?"

 나는 츄리닝 바지 속에 삼각팬티 하나밖에 입지 않았었다.

 

 그해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 덥던 운동장의 여름도 꼬리를 감추고 새털구름이 하늘 깊이 흘러들어

 첩첩이 박혀 있었다. 짙푸르던 교정의 나무들이 붉게 물들어 가던 고3 마지막

 가을 체육대회, 피 끓는 십대들의 순진무구한 열정 아래 구기 종목이 끝나고

 이제 남은 건 800m 계주뿐이었다.

 

 난 예고도 없이 반 대표 선수로 발탁되는 바람에 긴 바지를 벗고 뛸 수밖에 없었다.

 각 반 4명의 선수를 포진한 채, 전 학년 반별로 운동장을 빙 둘러선 관중 속으로

 이름자 때문에 언니라는 별명을 얻은나는 반아이들의 언니,언니라고 외치는구호를 들으며 나갔다.

 박수를 받으며 본부석 앞으로 나간 각 반 선수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늘을 한 번 우러러보고

 땅을 한 번 보고 뛰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화약총 소리와 함께 총알처럼 튀어 나가는 선수 틈에 우리 반 귀열이가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트랙을 한 비뀌 돈 두 번째 주자 종현이가 등뒤에 댄 내 손아귀에 배턴을 쥐어줬다.

 셋째 주자인 나는 오른손에 받은 배턴을 왼손으로 옮기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후후룩 달려나갔다.

 그런데...아뿔사 이게 웬일인가! 동편 축구 꼴대 근처 타원형의 트랙을 안쪽으로 쏠려 도는데

 으이그 거시기가 외출을 해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의 함성과 손가락질 사이로 가을이 노랗게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다른 반 선수들이 불이나케 쫓아오고 함성이 귀를 찟듯 울려온다. 

 내가 기권하면 우리반은 ...순간,안돼!

 나는 옷을 당겨 다시 집으로 집어 넣고 뛰는데 남자용 속옷의 틈새는 가만 놔두지 않았다.

 거시기는 다시 외출하고 에라 모르겠다 싶어 냅다 뛰어 우석이에게 배턴을 넘겨주고

 얼른 돌아서며 옷을 잡아당겨 원래 위치로 되돌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넌 집에 가서 혼날 줄 알어 왜 허락도 없이 외출이냐? 이쒸."

 

 그 시간 화학 선생님이신 여자 선생님과, 서무실 김양 누나와 서무보조원 아가씨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킥킥거리는 후배들과 친구들의 놀림만이 운동장가에 흩어지고있었다.

 그 뒤로 선생님들은 나를 보며 빙그레 웃으시며 지나가셨다.

 

 체육대회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우리반이 종합 1위를 했다.  

 나는 그 따끈한 추억 하나를 만들어 놓은 채 별일 없었다는 듯 푸른 기둥의 벽오동 나무 그늘에서

 운동화 속 모래를 털어내고 교실로 들어왔다.

 그리곤 창밖의 히말라야시다 나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운 빈 운동장으로 느릿느릿 가을 저녁이 오고 있었다.

 

 종례시간에 담임 (장흥갑)선생님께서  한 말씀 하셨다,

 

"소순희는 오늘부로 여자가 아니란 게 증명됐다 잉."^ ^ 

 

 

                                                                              

 

 

                                                                                  (그 해 여름. 소순희작 6호 정순희님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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