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주어야 할 것들이 많은데도 내 자유를 구속한 껍질을 깨지 못하고 이 시대를 살아왔다.
집약된 감정을 추스리기에도 빠듯한 정신의 유약함으로 내 영역에서 맴돌다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합리적 논리로 묶어두곤 했다.
다시 태어나도 그림을 그리겠느냐고 흔한 질문을 받으면
절대로 화가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 하면서
마음 한구석에선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으냐고 왜 이렇게 모순된 대답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 적어도 가족들에게 있어 내가 화가를 선택한 것은 가혹한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작가적 의식이나 소명은 접어두고라도 그린다는 본질은 살아 숨 쉬는 것이므로
화가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햐~! 저 빛깔 좀 보세요. 선생님!
저는 저런 빛깔을 볼 때마다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몽상의 겨울 끝 언저리로 봄이 질펀히 깔린 한강을 건너며 제자 지훈이 내게 말했다.
그는 공대생 이었고 적성과는 무관하게 모호한 학과가 싫은 거였고 최소한 자신의 자유와 선택의 길에
심사숙고로 그림에 입문한 청년이다.
그의 앞길이 험난하고 곤고할지라도 자신만이 가고자 하는 길이 보이는 것 또한 주님의 인도가 아닐까.
철커덕거리며 달리는 열차의 차창 밖으로 터너의 작품처럼 펼쳐진 풍경이
한강과 저녁 하늘과 불빛들이 하모니를 이루며 잠시 시야 속에 빨려 들어와 강하게 박혔다.
나는 지금까지 그림을 그려오면서 주님이 창조한 자연에 감탄하면서도 스스로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에
만족이나 어떠한 뚜렷한 의식을 가져보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사람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들이야 너무 평범하지 않는가.
자연을 재해석하고 이입하는 눈과 평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
화가가 해야 할 일임을 알기 때문에 조금씩 나의 껍질을 깨가고 있는 중이다.
2003. 3. 26. 흐림... 소순희.
<어느 거리에서/20호/2011/소순희작/김정숙님소장/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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