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캔바스 위의 날들)

그림이야기(15)-덕송리의 가을

소순희 2012. 2. 24. 20:46

 

 


                                                                          <덕송리의 가을/20p/1995/소순희 작>

 

 

정선읍에서 경사진 언덕길을 따라 한 1Km쯤 북평면 쪽으로 가다 보면 고즈넉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박힌다.

유유히 흐르는 조양강을 끼고 비탈에 버티고 선 스레이트지붕과 녹슨 양철지붕이 산촌의 빈약한 삶을 말해준다.

눈 아래 엎드린 집과 휘돌아 흐르는 강을 넣어 몇 장의 스케치를 하고 사진을 찍는데 상기된 얼굴을 한

초등학교 남자아이가 큰길에서 마을 길로 접어들어 내려오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보자 호기심과 놀란 눈으로 나를 흘깃거린다.

그 시절만 해도 거동이 수상한 자는 간첩이라고 학교에서 누누이 들어온 터라 그 아이도 사진을 찍고있는 내가

수상했던 모양이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 동무! 어데 갔다 오는 기야?"

" ...?"

" 말 하라우,내레뉘긴디 알갔어?" 하자 그 아이는 얼어붙은 표정을 하며 더듬거린다

" 하 학교에 갔다 오는 기래요"

" 멧 학년 임매?"

" 예?"

" 학생 동무래 멧 학년 이냐구"

" 2학년이요"

" 동무네 집구석이 어딤매?"

" 저어 아래요" 하며 손을 가리킨다. 유달리 눈이 큰 아이는 잔뜩 겁을 먹었다.

나는 내심 재밌어 하며 아이와 비탈길을 내려가며 계속 말을 걸었다.

" 동무네 고장에 있는 겡찰관서가 어데고 신고허면 순경 아새끼들이 잽싸게오나?"

" 저는 모모르겠어요"

" 학생 동무래 인민핵교에선 뭘 배우나?"

" 국어,산수,사회..."

" 기딴거 마알고-..- 총 싸움질 같은거어"

" 아 안 배우는데요"

아이는 이제 얼음판에 나자빠진 황소처럼 큰 눈을 굴리며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다.

.

" 키득키득 히히히, 얘야, 아저씨 간첩 아니다. 놀랐니? 괜찮아 아저씬 그냥 풍경 사진 찍으러 서울에서 온 사람이야."

아이는 그래도 겁먹은 표정이다.

그때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며 달려오자 아이는 얼른 안으며 나를 흘깃 보는데 안심이듯 표정이 밝아진다.

가을이 오는 산간 마을에 따순 볕이 내리는 오후다.

나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아이를 카메라에 담으며 서울 가면 보내줄게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사진을 찾아 약속한 사진을 보내주려고하다 아차 주소!?

이름도 주소도 묻지 않고 보내준다는 약속을 해버린 나의 진지하지 못함이 못내 씁쓸하다.

지금도 예전 사진에 끼어 있을 그 아이는 지금 20대 중반의 청년이 되어 어디에선가 어린 시절 이 추억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세월이 참 무상하다.

위 그림은 그 아이의 집이 있던 덕송리라는 작은마을이다.

                                                                                                            

                                                                                                               < 2012 /소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