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정오는 그야말로 모든 사물이 숨죽인채 고요에 빠질때다. 이따금 말매미만 키큰 미루나무에서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오후2~3시쯤이면 소먹이 풀을 베러가는 아이들이 망태기와 낫을 가지고 하나 둘 감나무밑 망루거리로 모여들었다.
돌담을 경계로 낮으막한 지붕과 지붕이 이마를 맛댄 집집엔 커다란 감나무가 한 두 그루씩 숲을이뤘다.
나와 친구들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논밭 사이로 난 길을 가로 질러 멱감으로 냇가로 향했다.
섬진강 한 지류인 요천은 풍족한 물과 깨끗함이 늘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여름 한 낮을 견디고 있는 밭작물들이 축 쳐져 있다가 저녁무렵이면 생기를 되찾곤했다.
냇가에 가는 길섶에 목화밭(전라도 사투리로는 미영밭)이 있었고 분홍이나 하얀 목화꽃이 지고나면 뾰쪽한 열매가 맺혔다.
이 목화열매가 영글고 때가 되면 네 쪽으로 벌어지고 하얀 목화솜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영글기도 전에 오동통한 풋열매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간식꺼리였다.
눈에 띄면 가만둘리 없는 아이들은 농부의 수고와 뒷날 무명옷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목화열매 도둑들이 여름 내내 훝고 지나간 자리에선 그야말로 목화송이를 구경하지 못했으니 밭주인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그런 못 된 짓에 주인 아주머니는 하얀 가루농약을 뿌리며 내심 기뻤으리라.
그러나 그게 밀가루란 것을 안 아이들은 그날도 냇가에 가면서 여나므개씩 호주머니에 따 넣은
촉촉하고 달콤한 풋 열매를 까먹어 가며 마을 앞 논에 물을 끌어 들이기 위해 보를 막은 고소바위에 가서
훌렁훌렁 옷을 벗고 벌거숭이로 멱을 감고 있는데, 얼굴이 붉게 상기된 아주머니가 씩씩대며 오더니
주섬주섬 옷을 죄다 걷어 가버리고 말았다.
울상이된 아이들은 고무신 한 짝으로 앞을 가린 채 주인 아주머니네 밭까지 일렬종대로 가는데
호리호리한 시골 아이들의 빈약한 몸뚱어리가 초록속에 유난히 눈에띄였다.
주인 아주머니께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보여 줄 것 다 보여 준 다음 옷을 찾아 입었다.
그 일이 있고부턴 한 동안 잠잠하더니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날 부터 다시 목화 열매는 수난을 당했다.
잘못을 저지른 뒤에 오는 댓가를 모면하려고 아이들은 옷을 벗어 모래에 묻거나 바위틈에 숨겨 놓고
멱을 감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은 아주머니는 옷을 찾지 못 하자 바락바락 욕을 퍼붓고 갔다.
그런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자 뭔가 모를 뉘우침에 눈물이 핑돌았다.
여름은 그렇게 서서히 막을 내리고 남은 목화송이는 여기저기서 하얗게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베틀에 앉아 삼베나 무명베를 밤새워 짰다.
베틀 주위에서 놀다 잠이든 다음 깨어 보면 그때까지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짤그락짤그락 베를 짜고 있었다.
소쩍새가 구슬피 우는 밤내 어머니는 한이 섞인 탄식조의 소리를 해가며 씨줄 사이로 북통을 옮겨가고
바디를 귀칙적으로 끌어당겨 날줄을 촘촘히 엮어나갔다. 올 하나하나가 한이라는 걸 안 것은 어른이 되어가면서였다.
도투마리에서 뱁댕이가 떨어질때마다 한 뼘씩 자라나는 눈물로 짠 피륙은 가난과 절망을 묶어내던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꿈 같은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고 그때 그 일들이 집요하게 내 유년의 날들을 헤집어 놓는 지금
나는 다시 돌아 갈 수 없음으로 서글프다.
2013/여름/소순희
<사진:일산님>
<사진:왕비님>
<사진:하늘의 별처럼님>
<강의근원/8호/소순희작/2013/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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