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1
오늘도 이젤 앞에 앉아
고향을 그린다
요천*의 맑은 물 속엔
왜 그렇게 자갈이 많을까
캔버스에 칠 해지는 고향의 색채
흰색을 칠 하면 농부가 되고
빨간색 칠 하면 고추가 되고
어머니 얼굴은 어디에 그릴까
쭉정이 같은 자식
도시로 보내고
논에 엎어지고 일어나며
그립단 말 못 하는 어머니
고향 풍경 속 다 어머니 얼굴이다.
1986.
*요천~섬진강의 한 지류인 시내. 장수군의 수분재에서 발원해서
분수령을 이루고 섬진강과 금강으로 흐름.
"엄니,이제 농사좀 그만하세요."
"그려,나도 이젠 허리가 꼬부라지고 힘없어 못해 묵것다.
쌀값도 없고 사가는 사람도 없다."
"....."
자식들에게 자양분 다 내어주고 오그라들고 허리굽은 내 어머니.
언제부턴가 이 땅의 농부들은 노력과 투자의 댓가를 얻지 못 하고 있다
마음 아프다.
나는안다 요천의 맑은물속 보듯 엄니 마음을, 그속에 많은 자갈처럼
그렇게 많은 근심을...
<우면산 기슭의 여름소순희畵(10p)>
풍경-(2)
소순희
들길 가다가
발 멈추고
앞서 걷는 아내의
아기 업은 뒷모습 보니
한 벌 옷 외출복으로 입고
빈 길을 간다
월급타면
겨울 내의 사준다던
내 약속은
물감 하나 더 사는데 그치고
또 봄이 와 버리겠다
겨울은 긴데
아내는 들길 속
점경 인물이 된다.
1986. 소순희.
물거품처럼 사라지던 약속은 켜켜이 내 마음의 밑바닥에 퇴적층처럼 쌓여 있다.
이 약속들은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못 지켰을 뿐이다.
그런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아내로서는
그것도 사랑으로 접수해 놓고 묵묵부답으로 넘겨온 날들이었다.
나는 안다. 그 모든 약속들을 ....
큰 아이가 갓난이였을 때 고향에 가게 됐다.
면 소재지 산동에서 버스를 내려 나는 가게에 들러 뭔가를 사고
들가운데로 난 곧은 신작로로 아내는 앞서 걷는데
왈칵 흐려진 눈으로 굴절되어오는
아내의 뒷모습이 점경인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그해 겨울 끝자락에 선 아내를 그리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그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지키지 못한 또 다른 약속일는지...
<독서하는 여인/6호/1995/ 소순희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