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머니와 살 부비고 산 햇수는 많지 않다. 중학교 때부턴 읍내(지금은 시)에 나와 줄곧 자취를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육학년 늦가을 마당에선 벼 타작이 한창이었고, 돌담 밑 감나무엔 감이 붉게 익어가던 그날 오후 무렵 중심을 잃고 부축을 받던 아버지가 남원읍내 병원으로 실려갔고 그 후로는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뵐 수 없었다. 그날 깊은 밤, 꿈결이듯 들려오던 아버지의 부음에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신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는 단장의 슬픔을 내어 보이지 않은 채 안으로만 삭이는 흐느낌에 컥컥 목이 메었고 어린 자식들을 껴안고 울다 세상풍파 헤치며 짐 다 지고 가야하는 각오로 이 악물고 살아가야 하는 앞날이 어머니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 해 스무 살 무렵의 큰 누님은 그 푸른 꿈을 저당 잡힌 채 초야에 묻혀야 하는 비운의 청춘을 온갖 일로 감당 해야 할 처지 였슴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가을은 덧없이 지고 그리고 겨울 긴긴 밤을 어머니는 아버지를 원망 하기도 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숨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셨을까. 어머니는 운명이려니 하고 남편 없는 집 휑한 찬 바람 불까 싶어 누님과 날마다 겨울 산을 오르며 나무를 해다 담 밑에 집 채 만큼씩 쌓아 놓곤 했다.
동네 사람들은 남의 말 하긴 좋아했다. 딸들은 고사하고 아들 하나 있는 것 학교공부 가르치긴 글렀으니
남산골 지게 대학이나 보내야 한다고 했고 일부 사람들은 그래도 가르쳐야 한다고 의견이 분분했다.그리고 그 모든 판단은 어머니의 몫이었다.작고 연약한 어머니의 힘으론 도저히 감당해내기 어려운 현실을 몇 날 밤을 고민하며 작정했을 그 심경을 나는 헤아리지 못 했고, 사람답게 살아보라고 내몬 고향의 어린 날을, 어머니의 사랑을 나는 깨닫지 못 하고 철부지로 살아왔다. 그리고 새털처럼 많은 날이 덧없이 흘렀다.
스물 몇 해이던가 고향집에 내려간 날은 추석을 이틀 앞둔 가을 오후였다. 나는 애석하게도 어머니보다도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쁨으로 마음이 들떠 있었다.고향의 낮은 지붕들이 초라하게 느껴짐은 도시물 먹었다는 우쭐함에서 오는 오만함이었을까.그 정다운 마을 집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니, 바보 같은 짜식.고향집 마당에 들어서자 텃밭엔 풍성하게 자란 배추가 널찍한 자리를 틀고 앉아있었다.문득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져 더욱 싱그럽게 보였다.
"엄니 저 왔어요." "......" 인기척이없다. 순간 허전한 마음이 밀려와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앞산을 바라보았다. 밤나무가 많은 뒷골 평지와 앞산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비단결처럼 포근하게 형형색색으로 제법 폼 난 가을 한자락을 끌어다 펼쳐놓았다. 유년에 저 앞산을 바라보며 언젠가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림 공부를 하게 된 이유 하나는 고향의 정서를 배신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자 주르룩 눈물을 흘리셨다. 옆구리엔 보자기로 덮은 소쿠리를 껴안고 막 마루에 내려놓으시며 후욱 한 숨을 내쉰다. "엄니, 아들이 왔는데 왜 우셔요? 반갑지도 않으셔요?" "왜, 안 반갑냐
내가 요새 좀 아파서 그런다잉" 힘이 하나도 없으신 어머니는 방앗간에서 쌀가루를 빻아오셨다. 추석에 쓸 떡 가루다.
마을에서 면 소재지까지 직선 거리로 약 1km쯤 되는 신작로가 만들어지고 길 양옆으로 코스모스를 심어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양,빨강 분홍빛 꽃들이 하늘거렸다.코스모스가 예쁘다는 걸 느껴 본적이 없었는데 나는 고향의 길에서 그 수수한 꽃을 참 예쁘다고 마음에 두고 있었다. 몇몇 친구와 그 길에서 오랜만의 만남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머니가 걸어오시고 있었다. "엄니. 어디 가셔요?" "응, 나 산동,보건소에 가서 주사 한 대 맞고 올란다.아파서..." "네, 다녀오세요." 나는 친구들과 히히덕거리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저 만큼 어머니가 힘없이 휘적휘적 코스모스길을 걸어 멀어져가고 있었다.
정말 나는 못된 놈이다. 바보 같은 놈이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뛰어가지 못한 불효막심한 놈.
어머니와 도란도란 얘기나누며 보건소에 다녀왔으면, 따스하게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드렸으면 그 때가 이렇게 마음 아프지 않을텐데...지금도 그 때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장 소중한 일 하나를 놓치고 난 지금 회한의 아픔으로 다시 끌어 안는 내 어머니의 모습, 나는 어머니께 선물도 용돈도 많이 못 드린다. 오히려 그걸 받고 속 쓰려 하시는 걸 보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퍼줘도 모자란다는 걸 매번 느낀다. 다만 어머니 앞에서 배가 부르더라도 맛있게 먹는 것도 어머니에겐 기쁨이므로 그 작은 부분이 효도이지않을까. 나는 어머니와 이틀에 한 번 30여 분씩 혹은 짧게 수다를 떤다. 그럴 때마다 전화비 많이나온다 끊어라. 하시면서도 푸념처럼 할 말씀 다 하시느 걸 보면 자식과 이야기하는 것이 최상의 기쁨인가보다.
-2006/10/소순희-
사진(조휴억/빈지게님)
결실 소순희작 (일본개인소장)4호
학의천에서 2006.10 수크령
서오능부근에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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