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그리고 현실

은행-발아(發芽)

소순희 2007. 1. 22. 00:46

 

가을은 느닷없이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여름 한 철을 잘 견뎌온 터라 새삼 가을이 도회지 깊숙이 찾아들어서야 가로수 잎이 져가고 있음을 알았다. 어쩌면 산다는 것이 때론 무심하다. 어느 날 버스 안의  전화중에 바뻐서 가을이 오고 그 여린 감성의 계절을 느껴 볼 겨를도 없었다고 다분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해놓고 화들짝 놀란 뒤끝 유리창 밖으로 노랗게 물든 가을 잎이 얼비치며 스쳐감을 보고서야 마음으로 가을 끝 무렵인 걸 느꼈다.

 

그해 가을 은행나무 가로수에서 둥근 열매가 잘 익어 몇 알씩 도로에 떨어지고 지독한 냄새에 사람들은

줍지 않고 지나치거나 밟아 으깨진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는 그중 한 알을 집어와 꽃이 죽어버린 화실 화분에 그 은행을 묻어 두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그 이듬해 봄에 흰 껍질을 쓰고 뾰롯이 푸른 싹을틔우는 것이 이뻐서 출근하면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단단한 각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리고 발아하는 생명력에 감탄하며 내가 심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 때가 되면 연녹색 애기 잎을 피우고 여름이면 어른 은행잎이 되고, 가을엔 노랗게 물들어가기를 여섯 해, 나는 죽지 않을 만큼 물주고 간혹 그 자리에 나무가 있노라고 여겼을 뿐 차츰 그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는 걸 몰랐다.

 

화실을 옮기고 난 후 적당한 자리가  없어 집으로 가져와 베란다에 놓아두었다. 여기서도 계절을 잃지 않고 지 할 짓은 다하는 은행나무의 한살이를 또 겪으며 나의 무심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흙 한 번 갈아주지 않고 버텨왔으니 오직이나 원망하겠는가. 그렇다고 분재를 할 기술도 없거니와 그저 자란대로 물만  주다가 지난가을에 화초용 영양제수액을 꽂아 주었는데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퍼뜩 생각하나 스쳐감이 올봄엔 밖에 옮겨 심어주어야겠다는 갸륵함(?)에 벌써 큰 나무그늘을 그려 보는 게 참 이기적이다. 그렇구나! 잘 기르지 못한 나에게 있어 나무는 여기가 감옥생활이었고 늘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를 얼마나 그리워하며 목말라 했을까. 이 겨울 지나고 나면 올봄엔 안양천 가로변에 꼭 옮겨 주어야겠다.

 

                                                                                              2007/소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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