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캔바스 위의 날들) 89

그림이야기(5)-볕드는 집

내가, 남해나 정선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의 호젓한 언덕 아래로 보이는 따뜻한 마을과,강원의 골깊은 산아래 나지막이 엎드린 산가의 소박함 때문이다. 강릉행 밤 기차의 한 줄기 빛에 11월의 어둠은 길을 터 준다. 먼 촌락의 불빛이 하나 둘 어둠에 묻히면 긴 외마디 기적도 울리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산 골골을 휘어져 돌아가는 늙은 자벌레의 몸통처럼 길게 늘어진 열차의 느린 행보뿐이다. 희미한 실내등과 맞물리는 청남빛 하늘의 부우연 빛깔 아래 그렇게 새벽은 오는 것이고 사람들은 또 하루를 맞는 것이다. 규칙적으로 철거덕 거리는 쇠바퀴 소리와 선로의 마찰음의 가수면 상태의 여행객에겐 그나마도 자연 속으로 떠남이라 정겹다. 증산역에서 정선 구절리행으로 바꿔 타는 새벽의 찬 바람 속에..

그림이야기(1)-이른 봄

이른 봄 20호 소순희작 oil on canvas(국창전 출품작) 의왕역에서 서쪽방향으로 작은 둔덕의 숲을 바라보고 가노라면 마을 초입에 폐허의 정미소가 예전의 전성기를 말해주듯 우직한 뼈대로 우뚝 솟은 채 찬 바람을 맞고 서 있다. 도시근교에 늘어나는 공장이 야금야금 점령한 땅을 무엇으로 되돌려받을 수 있단 말인가 1차산업인 농업이 쇠락해가는 수로는 콘크리트 축대로 무던히도 잘 견뎌내지만 이미 물은 죽었고, 영양실조에 걸린 수양버들은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이른 봄인데 물을 올려 늘어진 가지 끝마다 붉은빛을 감아낸다. 그것이 생명이고 희망이다. 2차산업인 공업 혁명이 과연 우리에게 얼마나 이로운 가는 먼 훗날 평가 될지라도 급속히 변하는 풍경에 씁쓸한 마음이다. 빛바랜 초록 지붕의 축사도 겨울 바람이 핥고..

소순희 그림모음-(4)

서울 도심에서 그리 멀지않는 부곡역(현.의왕역) 근교로 화구를 챙겨들고 길 떠나는 내게 초가을 바람은 자유롭다. 지난 여름 내내 폭염에 웃 자란 수초들 사이로 하늘 한 조각을 드리운 왕송 저수지 근처 제법 가을물이 든 철둑길 가의 쑥순들이 꽃대를 올려 씨앗을 맺어놨다. 바이올렛그레이 색깔의 수리산이 멀리 눈에들고, 저수지의 물 깊이는 가을 하늘 깊이와 비례하며 유백색 역광으로 부드럽다. 늙은 밤나무가 있는 울타리 너머의 농원과 소박하게 드리운 집 몇 채를 넣어 유화 한 점을 그렸다. 이 소박한 풍경들도 수년 뒤엔 개발이란 명목으로 파 헤쳐져 사라질지 모른다. 가을은 짧다. 2001. 10월에- 농원10호 소순희작(부곡에서) 광하의 가을4호(정선에서) 정선읍에서 솔치재를 넘어와 그 길 끝점에서 오른쪽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