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32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소순희 돌아서는 등 뒤로 한 번도 내어주지 않던 노을이 피었습니다 밤꽃 환한 유월 저녁도 서둘러 그림자를 지우고 산은 더 검푸르게 제자리로 돌아가 웅크립니다 그대 사랑한 만큼 하루해도 짧아 저녁 새 몇 마리 어스름 가르며 대숲으로 숨어들 듯 사랑도 한갓 하루 일 같아 기막힌 저녁놀 빛 속으로 숨어듭니다 본디 사랑함에 있어 숙맥인지라 애써 태연한 척 어두워져 가는 밤꽃 숲을 바라보았습니다 쉬이 눈을 거둘 일 아닌 풍경 속에서 자꾸만 주먹으로 닦는 눈물이 막차의 불빛에 빨려들고 있었습니다

시와 사랑 2023.06.13

가장(家長)

가장 (家長) 소순희 집으로 가는 굽은 언덕길은 늙은 플라타너스가 어느 가장의 마른 정강이처럼 희었다 발길질에 덧난 상처가 채 아물기도 눈도 귀도 상처투성이다 별일 아니라고 나무에 기대어 입속말로 달래는 한 잔 취기가 이렇게나 눈물겨울까 한 세상 머물 조립된 도시의 집들 그곳에 숨죽여 가며 자식을 길러내는 이 장엄한 삶 앞에 고개 숙인 아비들 위태로운 칼날 같은 하루를 딛고 간다 2004.소순희 누가 이 무변광야 같은 한 시대를 흔들리지 않고 살아 낼 수 있을까. 오늘의 가장들은 외롭다. 고독한 메신저, 힘내시라! 한 잔 술에 반은 눈물이라하지 않던가. 어뗳든 가족을 품는 울타리로 서 있는 한, 또 그곁에 같이 서는 누군가 있지 않은가!

시와 사랑 2023.05.29

아까시꽃

아까시꽃 소순희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돌아보면 흰 구름처럼 피어나는 아까시꽃 한창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일 없이 오월은 또 흔연히 마음을 붙잡습니다 시절을 두고 나는 모질지 못한 까닭에 당신, 그 조붓한 어깨에 내리는 그늘 한 자락도 봄의 숨결로 받습니다 이 봄도 그리운이여 안녕 * 아카시아는 잘 못 표기된 나무라네요 아까시가 맞다네요.

시와 사랑 2023.05.02

도원동-3

도원동-3 소순희 가난한 달동네 집마다 피는 꽃은 더 맑아 보였다 뒷배경이 허접한 봄날도 그곳에선 그다지 서럽지 않아 맘 편해지는 사는 맛이 났다 앵두꽃 피어 환한 좁은 마당집 노파가 해바라기로 앉아있는 오래된 나무 의자는 늘 반짝였다 그럴 때마다 골목을 돌아가던 봄바람도 느적느적 돌아와 앵두나무꽃 어루만지며 웃고 있었다 바람난 도미 이모가 돌아오던 봄날 용산역에서 신촌 쪽으로 가던 석탄 운반 열차가 유별나게 그르릉 거렸다 도원동에 봄이오면 행복은 그리 멀지 않는 곳에서 고개넘이를 기웃대다 꽃처럼 화들짝 피어났다 잊혀진 것들이 다시 돌아와 꿈꾸는 달동네 도원동

시와 사랑 2023.04.25

자작나무 숲에서

자작나무 숲에서 소순희 죽렴지맥의 마차령을 넘으며 직립 보행하다 멈춰선 나무를 보았다 흰 목질부를 드러낸 자작의 겨울이 이다지도 깊이 숨어든 까닭을 아는가고 숲속에드니 옛적 산 몇 번지에 전입한 멧비둘기가 고요 속으로 추락한다 해발 칠백고지의 눈 덮인 산중 하강의 엄숙함이 발목 잡는 자작 숲에는 나그네 겨울 하루 두고 온 서울의 온정이 눈물겨워 나무 끝 하늘만 바라보다가 몸통 끌어안고 귀 대어보니 아득하게 비어버린 내 유년의 성장통을 자작 숲도 겨우내 앓고 있었다 죽렴지맥 (竹廉枝脈) 백두대간 함백산 만항재에서 석항천 북쪽 죽렴산 곰봉(1016),고고산 능암덕산을 지나 동강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40km의 산줄기를 죽렴지맥이라한다

시와 사랑 2023.03.02

겨울 나무에 대한 명상

겨울 나무에 대한 명상 소순희 어제는 산에 가서 겨울잠에 취한 나무들을 보았다 찬란함도 한때 이거늘 서늘함에 몸 뉜 맹아의 가지 끝 건조한 하늘로 삐릭삐릭 삐이익 의문의 문장을 송신하는 산새 한 마리 머물다 간다 뒤숭숭한 꿈을 꾸는지 골짜기마다 나무들, 막 젖 뗀 유아의 잠꼬대처럼 흔들림이 애처롭다 산 어디에나 슬어 놓은 새끼들 숨소리마저 막막한 겨울 한 철 던져진 곳 척박한 생의 목마름으로도 뿌리 박고 어깨 겯는 동거가 살아 간다는 이유로 성스럽다 나이테를 좁혀가며 맨몸으로 견디는 고락에도 아름다운 속내의 현실이 드러나는 이 숭고한 의식을 외면할 순 없지 않는가 2021

시와 사랑 2023.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