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15

그 찻집에 가서

그 찻집에 가서 소순희 대추차 잘 다린다는 창 넓은 그 찻집에 가서 추적추적 가을비 내리는 한나절 안개 젖는 산 실루엣 배경에 시 하나 묻어 두고 올까 파초도 시들어 가는 문밖 풍경이나 끄적이다 올까 문득 여기까지 와 버린 가을 길도 없는 계절을 찾아온 저 무수한 흔적들에 경의를 표함은 그저 바라보며 마음 내주어 감탄할 일 뿐이다 2023

시와 사랑 2023.11.05

가을 안부

가을 안부 소순희 사랑하는 이여! 가을볕 찬란히 눈부시다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묻지만 꿈결 같은 날은 또 저렇게 속절없이 지고 우리는 이 가을 어디서 만날 것인가 붉은 색깔로 타오르는 맨드라미처럼 정녕 이 가을 속 알 수 없구나 내 삶이 느슨해질 때 곰삭은 가을 한쪽으로 다시 팽팽해지는 필연의 계절 나, 너로 인해 붉게 피가 잘 돌아 정신 맑은 가을이다 사랑하는 이여! 이 가을 잘 있느냐고

시와 사랑 2023.10.20

도깨비바늘

도깨비바늘 소순희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다 바짓가랑이에 붙어 집까지 따라온 도깨비바늘의 검은 눈을 보았다 올곧게도 바늘을 꽂아 동행하며 어딘가로 멀리 떠나 일가를 이루고 싶은 한해살이풀로 긴 여름 견뎌오며 품어 온 새끼들 오죽하면 타인의 몸 빌려 퍼뜨리고 싶었으랴 이 악문 씨앗들 뜯어내며 눈물이나 울타리 가에 고이 묻어주었다 아버지도 청천 하늘 우러러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곳에 우리를 슬어놓고 떠나셨다 속수무책이던 세월에 도깨비바늘처럼 붙어산 어린것들의 귀에 징그러운 바람 소리 얼마였더냐 그래도 몸 부려 동행하는 오늘이 희망이라고 아무도 모르게 속 깊이 묻어주었다 2013 (월간 모던포엠 2014, 3월호 수록) 도깨비바늘 Spanish needle 국화과에 속하는 일년생초. 인도와 중국, 말레이시아 등이..

시와 사랑 2023.10.04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소순희 벌레 소리 들리느냐고 재차 묻는 그에게 나는 입술에 손가락 세워 조용히 하라는 부호 하나를 던졌다 자연의 음률을 숨죽여 듣는 불협화음에도 질서가 있는 저 무량한 이치를 어느 별 아래서 느낄 것인가! 뉴우침 없어도 스스로 고백하는 이 허다한 죄의 파멸 어느 가을밤 벌레 소리 들릴 때마다 프리다 칼로의* 직소퍼즐 같은 꿰맨 가슴 속으로 가을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2023 *프리다 칼로~멕시코 국민 여류화가 그녀의 생은 고통을 통과한 삶의 의지와 강렬한 내면의 존재감을 그려냈다.

시와 사랑 2023.09.24

세한도(歲寒圖)

소순희작/시간에 기대어/2021 세한도~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생활 할 때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그려준 문인화로 국보 제 180호이다. 세한도(歲寒圖) 소순희 이제는 보내마 속 깊이 간직한 그때 너를 잡아 둘 여력도, 그리워하며 삭아가는 숭숭 뚫린 마음 자락도 매어둘 한 그루 나무도 없다 사는 게 그런 것이어서 나이 든 송백(松柏) 무욕의 그늘로 한갓 지나는 차운 바람 줄기가 오히려 무상하노니 홀로 묻는 빈 무덤 자리도 족함이거늘 유배의 한 숨 밖으로 이제는 보내줄 너만이 뚜렷이 남는 허리 휜 긴 하루가 있을 뿐이다 2021

시와 사랑 2023.08.25

배롱나무

배롱나무 소순희 사랑이여 무슨 기별 있어 기다림 남은 여름을 타오르느냐 붉은 입술은 흰 목질부에 기대어 산 죄였더니 얼마나 그리우면 눈물 바람 같은 꽃 백일을 피워내고 한목숨 지상에 훌훌 내맡기느냐 그렇게 살아온 날이 아직도 그리움이라면 영영 기다리겠네 사랑이여 2014 J에게(55)-병산서원에서 J,산다는 것이 팍팍해지거나 외로워지면 어딘가로 훌쩍 길 떠나 마음의 눈으로 풍경을 바라보십시오. 꽃다운 젊은날도 세월 앞에 숙연 해지고 무심한 것들이 오히려 정다워지는 산자락 양지녘 어느분의 유택에 가만히 앉아 말 없음의 이유로 깊어지는 중년의 내면을 성찰합니다. 3월 2일 안동 풍천면 병산서원에 왔습니다. 하회 마을을 나와 자동차 두 대가 간신히 비껴 서는 비포장 도로를 십리남짓 달리면 낙동강 상류가 태극 ..

시와 사랑 2023.08.19

감꽃 글씨

감꽃 글씨 소순희 고향 집 흰 회벽에 연필로 쓴 세로글씨가 막 돋는 아기의 젖니처럼 고왔다 염소 새끼 난 날과 감꽃이 피었다는 날을 가지런히 적어 놓았던 소 학교도 못 다닌 아버지 마흔의 봄날이 거기 피어 있었다 어깨너머로 흘러든 노을 진 하늘로 번지는 감꽃 같은 글씨 하나둘 깨치며 기뻤을 아버지 무딘 손가락 오그려 쥔 손에 아버지의 푸른 날이 획마다 곱게 배어 있었다 2019

시와 사랑 2023.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