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32

4월의 기약

4월의 기약 소순희 그대여, 진달래 피면 돌아오라 풍문으로 듣는 것은 헛된 것이어서 4월의 일들은 모를 일이다 묵묵부답인 저 산 푸르름에도 한사코 그대 이름자 깃드노니 도처에 붉은 메아리로 숨어 허물 많은 내게 부끄러운 기약도 한갓 되돌아오는 답신이었던가 하루해 길어지면서 보고픈 게 더 늘어가 진달래 피는 것도 죄가 된다면 이적지, 피고 지는 꽃들은 그대로 인한 죄 가린 그늘막이었더냐 물 오른 버드나무 꺽어 불어주던 호드기 소리 듣고 싶구나 그리하여 늦 뱀의 잠 깨우는 4월에는 그대여, 모든 길 트인 봄 날로 돌아오라 2024

시와 사랑 2024.04.05

그녀의 일

그녀의 일 소순희 꽃을 보려면 한 번쯤 몸살을 앓아야 한다는 궤변을 나는 봄맞이라고 생각했다 겨우내 적조한 그녀와 나 사이 노심초사 칼바람 속 웅크린 저 무량한 속내를 봄이 온다고 열 수 있으랴 꽃이 핀다고 어찌 쉬이 피어나겠는가 속으로 감춰온 눈물과 소진한 진액의 결정으로 견뎌온 삼동의 끝에서 눈 뜨는 기적의 반란, 그리하여 꽃은 빛깔과 향기로 개화한다 2024

시와 사랑 2024.03.21

빚쟁이

빚쟁이 소순희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 아무 빚도 지지 말라 하신 주님 말씀 명심하며 참, 잘 견뎌 왔습니다 아름아름 건너온 징검다리 같은 생의 후반 그사이 빚을 많이 졌습니다 오래 묵은 사랑의 흔적이 남긴 마음 자락도 골이 깊어 자꾸만 빚만 늘어갑니다 실핏줄까지 전해오는 이 무량한 사랑이 천둥벌거숭이 나를 키워온 그 사랑 빚 언제 갚을지 몰라 새기고 새겨 부실한 내 영육 간에 낙인을 찍고도 도도히 흐르는 세월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2023

시와 사랑 2024.03.09

파미르고원을 꿈꾸며

파미르고원을 꿈꾸며 소순희 내 생에 한 번쯤 파미르고원 유목의 날을 은둔의 첩경으로 한 달포 지내보고 싶네 만년설 배경의 눈 시린 풍경과 숨 막히도록 트인 구릉에서 잡힐 것 하나 없는 멈춘 시간의 망아지 울음을 듣는 날은 초원 문명도 헛된 기억이되리 별자리 스치고 지나가는 유성도 더 찬란할 거고, 포플러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도 더 푸를 거니 나, 거기 파미르고원에 은둔한 유목의 날은 생의 일부가 참, 깨끗해지겠네 2024

시와 사랑 2024.02.15

제재소에서

제재소에서 소순희 악산 능선 같은 회전 톱날에서 그가 켠 나무 향이 났다 보지 않고도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는 건 등고선처럼 그어진 속살에서 고유의 화인으로 내보내는 향 때문이다 무엇이 되어 만날지 모르는 나무는 절명의 순간을 그 산, 그 흙, 닮은 근원으로 회귀하는 맞물린 결집이다 쌓인 톱밥만큼 눕는 묵묵한 입 닫음도 가장 아리게 해체된 마음자리다 어머님을 보내고 돌아오던 길엔 언제나 제재소 옆길로 돌아왔다 등 뒤에 숨긴 문란한 생각이 행여 나를 칠까 도시 외곽 제재소 톱 소리로 잘라내며 걷노니 나무 향이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2016

시와 사랑 2024.01.31

눈 소순희 남녘에 눈이 내린다는 날은 고향 아짐들, 눈 속에 묻혀 신김치 찢어 전이나 부쳐 먹을까? 민화투나 치며 깔깔거릴까? 까마득히 하늘을 덮는 눈송이는 그칠 줄 모르고 장지문으로 스며드는 쌓이고 쌓인 눈빛이 잠들지 못한 얼굴처럼 창백하겠다 일기예보는 연일 눈이 온다는데 외풍 드는 황토벽 그 방에 나도 갇혀 청솔가지 군불 때는 구들장에 등 지지며 한 사흘 지친 몸 뉘어 봤으면

시와 사랑 2024.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