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15

가시고기

가시고기                                            소순희 한동안 잊고 지냈던,잊어버리자고 애썼던 눈먼 발끝 쯤에서장다리 밭 봄날을 홀연히 등 뒤에 감춘 그 하루남은 생마저 아득해져서나풀거리는 나비 떼 속에 앉아이제야 생각나는 봄볕에 젖는 이름 하나불러 보았습니다조랑조랑 슬어 놓은 새끼들 제 갈 길 가고심중에는 몽유병 같은 뭉근한 염려만 남아제 몸 삭아가는 걸 알면서 한사코 제 몸에 삭여 넣는 그리운 자식들의 가시,찔리고 아파도 머릴 맞댄 허공에 조아리는허무한 한 생이 빈 껍질로 남았습니다.                                 2024                                                 민물고기인 가시고기 수컷은 부..

시와 사랑 2024.04.30

장호원에서

장호원에서                                     소순희쓸쓸히 등 돌렸던 가을 사람도이 길을 걸었을까요절한 그도 복사꽃 아래마음 설렌 적 있었을까장호원에선물 올리는 복숭아나무 가지마다눈 트는 소리 듣노니상춘지절 초목도 덩달아 숨소리 은밀하다 산 굽이 하나 돌면 분홍빛 몸 푸는 언덕마다 다시 분홍빛 두근거리는 무릉도원 봄날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꽃 피워도나 어떡하라고 환장할..

시와 사랑 2024.04.21

제라늄

제라늄 소순희 누이야, 너에게도 꽃바람일던 하루가 있었니? 몇 해 전 화원에서 건조한 내 마음 밭에 무슨 바람 불어 쉬이 저무는 봄 같이 흔한 화초를 사 왔다 그해 가을까지 그냥, 마음이 꽃구름처럼 풀어져 영문 모르게 가을도 지고 잠 못 드는 밤 별도 하나둘 지고 차츰, 목마른 화초가 잊혀질 무렵 바람 탱글탱글한 지독한 겨울 속에서도 너의 입술 같은 붉은 꽃 피워낸 날들이 대견하다 누이야, 세상의 모든 것들에 눈감으면 어지럽고, 마음 뜨면 외로워진다 불면의 밤은 다시 오지 말고 사계의 마디마다 꽃 피워주기를 봄 편지로 쓴다 2023

시와 사랑 2024.04.14

4월의 기약

4월의 기약 소순희 그대여, 진달래 피면 돌아오라 풍문으로 듣는 것은 헛된 것이어서 4월의 일들은 모를 일이다 묵묵부답인 저 산 푸르름에도 한사코 그대 이름자 깃드노니 도처에 붉은 메아리로 숨어 허물 많은 내게 부끄러운 기약도 한갓 되돌아오는 답신이었던가 하루해 길어지면서 보고픈 게 더 늘어가 진달래 피는 것도 죄가 된다면 이적지, 피고 지는 꽃들은 그대로 인한 죄 가린 그늘막이었더냐 물 오른 버드나무 꺽어 불어주던 호드기 소리 듣고 싶구나 그리하여 늦 뱀의 잠 깨우는 4월에는 그대여, 모든 길 트인 봄 날로 돌아오라 2024

시와 사랑 2024.04.05

그녀의 일

그녀의 일 소순희 꽃을 보려면 한 번쯤 몸살을 앓아야 한다는 궤변을 나는 봄맞이라고 생각했다 겨우내 적조한 그녀와 나 사이 노심초사 칼바람 속 웅크린 저 무량한 속내를 봄이 온다고 열 수 있으랴 꽃이 핀다고 어찌 쉬이 피어나겠는가 속으로 감춰온 눈물과 소진한 진액의 결정으로 견뎌온 삼동의 끝에서 눈 뜨는 기적의 반란, 그리하여 꽃은 빛깔과 향기로 개화한다 2024

시와 사랑 2024.03.21

빚쟁이

빚쟁이 소순희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 아무 빚도 지지 말라 하신 주님 말씀 명심하며 참, 잘 견뎌 왔습니다 아름아름 건너온 징검다리 같은 생의 후반 그사이 빚을 많이 졌습니다 오래 묵은 사랑의 흔적이 남긴 마음 자락도 골이 깊어 자꾸만 빚만 늘어갑니다 실핏줄까지 전해오는 이 무량한 사랑이 천둥벌거숭이 나를 키워온 그 사랑 빚 언제 갚을지 몰라 새기고 새겨 부실한 내 영육 간에 낙인을 찍고도 도도히 흐르는 세월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2023

시와 사랑 2024.03.09

파미르고원을 꿈꾸며

파미르고원을 꿈꾸며 소순희 내 생에 한 번쯤 파미르고원 유목의 날을 은둔의 첩경으로 한 달포 지내보고 싶네 만년설 배경의 눈 시린 풍경과 숨 막히도록 트인 구릉에서 잡힐 것 하나 없는 멈춘 시간의 망아지 울음을 듣는 날은 초원 문명도 헛된 기억이되리 별자리 스치고 지나가는 유성도 더 찬란할 거고, 포플러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도 더 푸를 거니 나, 거기 파미르고원에 은둔한 유목의 날은 생의 일부가 참, 깨끗해지겠네 2024

시와 사랑 2024.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