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15

제재소에서

제재소에서 소순희 악산 능선 같은 회전 톱날에서 그가 켠 나무 향이 났다 보지 않고도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는 건 등고선처럼 그어진 속살에서 고유의 화인으로 내보내는 향 때문이다 무엇이 되어 만날지 모르는 나무는 절명의 순간을 그 산, 그 흙, 닮은 근원으로 회귀하는 맞물린 결집이다 쌓인 톱밥만큼 눕는 묵묵한 입 닫음도 가장 아리게 해체된 마음자리다 어머님을 보내고 돌아오던 길엔 언제나 제재소 옆길로 돌아왔다 등 뒤에 숨긴 문란한 생각이 행여 나를 칠까 도시 외곽 제재소 톱 소리로 잘라내며 걷노니 나무 향이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2016

시와 사랑 2024.01.31

눈 소순희 남녘에 눈이 내린다는 날은 고향 아짐들, 눈 속에 묻혀 신김치 찢어 전이나 부쳐 먹을까? 민화투나 치며 깔깔거릴까? 까마득히 하늘을 덮는 눈송이는 그칠 줄 모르고 장지문으로 스며드는 쌓이고 쌓인 눈빛이 잠들지 못한 얼굴처럼 창백하겠다 일기예보는 연일 눈이 온다는데 외풍 드는 황토벽 그 방에 나도 갇혀 청솔가지 군불 때는 구들장에 등 지지며 한 사흘 지친 몸 뉘어 봤으면

시와 사랑 2024.01.12

산은 늘

산은 늘 소순희 저녁 안개로 지워진 산이 드러나자, 눈이 내렸다 검게 웅크린 산은 평소보다 두어 발 뒤로 물러앉아 저녁 눈을 다 받았다 나도 머리에 눈을 이고 한참을 산 아래 서서 고요를 밀어내자 한 겹 어둠이 출렁였다 저 무주공산에 내려앉는 저녁 눈 흰 뼛속 깊이 나무를 길러낸, 삭신 쑤시는 골짜기마다 작은 짐승들 길러낸, 고립의 날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먼발치에 점등된 온기를 가슴으로 받는 겨울 저녁 사랑은 늘 거기 있다고 허접한 모든 것을 덮으며 눈은 발자국마져 다 지우고 있었다 2023

시와 사랑 2024.01.02

겨울, 그 위대한

겨울, 그 위대한 소순희 쇠락한 앞산의 조망에서 눈을 거둔 지 오래다 무심코 바라본 앞산은 낮아질 대로 낮아진 채도의 나무들이 서로 얼굴을 부비고 있다 지난가을보다 푸른 하늘은 산 위에 요염한 낮달을 품고 날 것 하나 올리지 않았다 겨울은 이미 잉태의 축복이 서린 바이올렛 그레이 나무들 만삭의 여인처럼 서 있다 저런 고상한 것들은, 저런 생명들은, 내가 감춘 마음의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위대한 흔적이다

시와 사랑 2023.12.27

억새꽃

억새꽃 소순희 억새 흰꽃이 허공에 흩어진 뒤에도 아직 꽃줄기에 붙어 떠나지 못하는 몇 개의 꽃을 보며 자식 못 떠나보내는 어미를 생각했다 훨훨 떠난 자리마다 뼈만 남은 마디사이 그중 제일 못난 놈이 찬 바람 맞으며 어미의 외로운 끈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겨울이나 지나면 가라고 붙드는 것일까 마음 둔 찬 바람 이는 산기슭 외진 곳 야윈 어미의 손을 겨울 가도록 놓지 못하는 억새꽃 몇 개 2023

시와 사랑 2023.12.17

슬픔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소순희 도저히 믿기지 않는 오래 묵은 슬픔은 어둑해진 전나무숲 아래 그믐처럼 내려앉아 있다 가을이 가기 전 뜨락에 내려서서 올려다본 나무 끝 하늘엔 별 몇 개가 올라앉아 내 슬픔을 기어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때론 허용된 일말의 긴박한 말도 설정된 운명이라 생각하면 차라리 가벼운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지만, 그래도 슬픔 하나 없다는 건 허망하다 저녁 하늘을 밟고 어둠 속으로 날던 기러기도 어린 기억의 오래 묵은 슬픔이다 2023

시와 사랑 2023.12.13

한순간 꿈처럼

2023,11,11 Sketch 가을 깊어 기온이 급 강하했다. 나뭇잎 지기 전 남겨야할 한 해의 가을이다. 볕이 좋은 날이다. 한순간 꿈처럼 소순희 저 색깔 고운 가을녘이면 님아 죽음보다 깊은 잠도 헛되지 않으리 결국은 너와 나 황혼의 가을 속에 눕는 일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거니와 목멘 기다림도 구석기 유물처럼 무딘 족쇄의 구속인 걸 지상의 살아 있는 것이 숨죽여 침묵할 때 가만히 침잠하는 몹쓸 놈의 잠도 귓바퀴를 돌다 쉬이 거두어들이는 그늘 속에 다시 빈손으로 접는 긴 산 그림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점에서 서로 다른 뜻도 기어이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허망한 바람 같은 것 아니더냐 사랑도 한갓 생의 추임새로 신명 나더니 한순간 꿈처럼 지나온 세월 앞에 온순해지네 아,아 몰락함도 어차피 시린 너..

시와 사랑 2023.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