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늘 소순희 저녁 안개로 지워진 산이 드러나자, 눈이 내렸다 검게 웅크린 산은 평소보다 두어 발 뒤로 물러앉아 저녁 눈을 다 받았다 나도 머리에 눈을 이고 한참을 산 아래 서서 고요를 밀어내자 한 겹 어둠이 출렁였다 저 무주공산에 내려앉는 저녁 눈 흰 뼛속 깊이 나무를 길러낸, 삭신 쑤시는 골짜기마다 작은 짐승들 길러낸, 고립의 날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먼발치에 점등된 온기를 가슴으로 받는 겨울 저녁 사랑은 늘 거기 있다고 허접한 모든 것을 덮으며 눈은 발자국마져 다 지우고 있었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