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15

내 친구

내 친구 소순희 순희야, 지금 바로 하늘 한번 봐주라. 깊은 밤 내게 메시지가 들어왔다 창가에 나가 올려다본 하늘 구름을 비켜난 달이 음력 유월 보름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이 새벽의 아름다운 전율 누구랴 내게 이 선물을 보내주겠는가 나, 이처럼 충만한 밤은 잠 못 이룬들 무엇이 헛될까 음력 열 닷새 허공에 뜬 달에 쏘아 올린 마음 맑은 그대, 내 친구 용재의 시선이 휘영청 맑구나 2023

시와 사랑 2023.08.05

막장에 대한 예의

막장에 대한 예의 소순희 화절령 운탄고도를 진폐증 앓던 제무시가 그르렁대며 넘었다 고생대 칠흑의 어둠을 두더지처럼 먹고 산 막장의 선산부 김형 더는 물러설 벼랑도 없다고 선택한 지하 몇백 미터 저승에서 뼈 갈아 숨 가쁘게 벌어 온 돈으로 이승의 생을 꾸려가던 살가운 가족의 웃음 소리마저 검은, 갱도 나무 기둥에 화석으로 새겨 놓은 오늘도 무사히 라는 말 얼마나 절실했으면 퇴적층이 된 아버지의 하늘과 젖 물리지 못한 어머니의 땅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막장의 삶도 더운 피가 흘렀더니라 낙엽처럼 사윈 그해 가을 소금기 절은 갱도 벽에 긁어 파낸 뜨거운 글씨 오늘도 무사히! 안전모의 불빛에 맥없이 흐렸다 2023 화절령~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과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인 백운산 자락의 고개이다. 근처 탄광에서 채탄 ..

시와 사랑 2023.07.16

별이 지는 쪽으로

별이 지는 쪽으로 소순희 별이 지는 서쪽으로 가다 내 껍질 속 나도 망초꽃 무성한 길을 걷고 있음을 보았다 한낮을 지나온 이순저수지 해거름 놓인 발자국 자취 없는 흙냄새 피어 길을 가다 멈춰서서 바라보는 노을 길은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아직은 여름꽃 지지 않아 푸른 기다림인 양 물새들 날고 잠긴 물은 무슨 꿈이 있어 퍼내도, 퍼내도 산 그림자 담아 내느냐 별이 지는 서쪽은 내 영혼의 잠 터 은밀히 풍경 속에 물들어 가는 2022

시와 사랑 2023.07.12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소순희 돌아서는 등 뒤로 한 번도 내어주지 않던 노을이 피었습니다 밤꽃 환한 유월 저녁도 서둘러 그림자를 지우고 산은 더 검푸르게 제자리로 돌아가 웅크립니다 그대 사랑한 만큼 하루해도 짧아 저녁 새 몇 마리 어스름 가르며 대숲으로 숨어들 듯 사랑도 한갓 하루 일 같아 기막힌 저녁놀 빛 속으로 숨어듭니다 본디 사랑함에 있어 숙맥인지라 애써 태연한 척 어두워져 가는 밤꽃 숲을 바라보았습니다 쉬이 눈을 거둘 일 아닌 풍경 속에서 자꾸만 주먹으로 닦는 눈물이 막차의 불빛에 빨려들고 있었습니다

시와 사랑 2023.06.13

가장(家長)

가장 (家長) 소순희 집으로 가는 굽은 언덕길은 늙은 플라타너스가 어느 가장의 마른 정강이처럼 희었다 발길질에 덧난 상처가 채 아물기도 눈도 귀도 상처투성이다 별일 아니라고 나무에 기대어 입속말로 달래는 한 잔 취기가 이렇게나 눈물겨울까 한 세상 머물 조립된 도시의 집들 그곳에 숨죽여 가며 자식을 길러내는 이 장엄한 삶 앞에 고개 숙인 아비들 위태로운 칼날 같은 하루를 딛고 간다 2004.소순희 누가 이 무변광야 같은 한 시대를 흔들리지 않고 살아 낼 수 있을까. 오늘의 가장들은 외롭다. 고독한 메신저, 힘내시라! 한 잔 술에 반은 눈물이라하지 않던가. 어뗳든 가족을 품는 울타리로 서 있는 한, 또 그곁에 같이 서는 누군가 있지 않은가!

시와 사랑 2023.05.29

아까시꽃

아까시꽃 소순희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돌아보면 흰 구름처럼 피어나는 아까시꽃 한창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일 없이 오월은 또 흔연히 마음을 붙잡습니다 시절을 두고 나는 모질지 못한 까닭에 당신, 그 조붓한 어깨에 내리는 그늘 한 자락도 봄의 숨결로 받습니다 이 봄도 그리운이여 안녕 * 아카시아는 잘 못 표기된 나무라네요 아까시가 맞다네요.

시와 사랑 2023.05.02

도원동-3

도원동-3 소순희 가난한 달동네 집마다 피는 꽃은 더 맑아 보였다 뒷배경이 허접한 봄날도 그곳에선 그다지 서럽지 않아 맘 편해지는 사는 맛이 났다 앵두꽃 피어 환한 좁은 마당집 노파가 해바라기로 앉아있는 오래된 나무 의자는 늘 반짝였다 그럴 때마다 골목을 돌아가던 봄바람도 느적느적 돌아와 앵두나무꽃 어루만지며 웃고 있었다 바람난 도미 이모가 돌아오던 봄날 용산역에서 신촌 쪽으로 가던 석탄 운반 열차가 유별나게 그르릉 거렸다 도원동에 봄이오면 행복은 그리 멀지 않는 곳에서 고개넘이를 기웃대다 꽃처럼 화들짝 피어났다 잊혀진 것들이 다시 돌아와 꿈꾸는 달동네 도원동

시와 사랑 2023.04.25

자작나무 숲에서

자작나무 숲에서 소순희 죽렴지맥의 마차령을 넘으며 직립 보행하다 멈춰선 나무를 보았다 흰 목질부를 드러낸 자작의 겨울이 이다지도 깊이 숨어든 까닭을 아는가고 숲속에드니 옛적 산 몇 번지에 전입한 멧비둘기가 고요 속으로 추락한다 해발 칠백고지의 눈 덮인 산중 하강의 엄숙함이 발목 잡는 자작 숲에는 나그네 겨울 하루 두고 온 서울의 온정이 눈물겨워 나무 끝 하늘만 바라보다가 몸통 끌어안고 귀 대어보니 아득하게 비어버린 내 유년의 성장통을 자작 숲도 겨우내 앓고 있었다 죽렴지맥 (竹廉枝脈) 백두대간 함백산 만항재에서 석항천 북쪽 죽렴산 곰봉(1016),고고산 능암덕산을 지나 동강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40km의 산줄기를 죽렴지맥이라한다

시와 사랑 2023.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