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32

산은 늘

산은 늘 소순희 저녁 안개로 지워진 산이 드러나자, 눈이 내렸다 검게 웅크린 산은 평소보다 두어 발 뒤로 물러앉아 저녁 눈을 다 받았다 나도 머리에 눈을 이고 한참을 산 아래 서서 고요를 밀어내자 한 겹 어둠이 출렁였다 저 무주공산에 내려앉는 저녁 눈 흰 뼛속 깊이 나무를 길러낸, 삭신 쑤시는 골짜기마다 작은 짐승들 길러낸, 고립의 날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먼발치에 점등된 온기를 가슴으로 받는 겨울 저녁 사랑은 늘 거기 있다고 허접한 모든 것을 덮으며 눈은 발자국마져 다 지우고 있었다 2023

시와 사랑 2024.01.02

겨울, 그 위대한

겨울, 그 위대한 소순희 쇠락한 앞산의 조망에서 눈을 거둔 지 오래다 무심코 바라본 앞산은 낮아질 대로 낮아진 채도의 나무들이 서로 얼굴을 부비고 있다 지난가을보다 푸른 하늘은 산 위에 요염한 낮달을 품고 날 것 하나 올리지 않았다 겨울은 이미 잉태의 축복이 서린 바이올렛 그레이 나무들 만삭의 여인처럼 서 있다 저런 고상한 것들은, 저런 생명들은, 내가 감춘 마음의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위대한 흔적이다

시와 사랑 2023.12.27

억새꽃

억새꽃 소순희 억새 흰꽃이 허공에 흩어진 뒤에도 아직 꽃줄기에 붙어 떠나지 못하는 몇 개의 꽃을 보며 자식 못 떠나보내는 어미를 생각했다 훨훨 떠난 자리마다 뼈만 남은 마디사이 그중 제일 못난 놈이 찬 바람 맞으며 어미의 외로운 끈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겨울이나 지나면 가라고 붙드는 것일까 마음 둔 찬 바람 이는 산기슭 외진 곳 야윈 어미의 손을 겨울 가도록 놓지 못하는 억새꽃 몇 개 2023

시와 사랑 2023.12.17

슬픔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소순희 도저히 믿기지 않는 오래 묵은 슬픔은 어둑해진 전나무숲 아래 그믐처럼 내려앉아 있다 가을이 가기 전 뜨락에 내려서서 올려다본 나무 끝 하늘엔 별 몇 개가 올라앉아 내 슬픔을 기어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때론 허용된 일말의 긴박한 말도 설정된 운명이라 생각하면 차라리 가벼운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지만, 그래도 슬픔 하나 없다는 건 허망하다 저녁 하늘을 밟고 어둠 속으로 날던 기러기도 어린 기억의 오래 묵은 슬픔이다 2023

시와 사랑 2023.12.13

한순간 꿈처럼

2023,11,11 Sketch 가을 깊어 기온이 급 강하했다. 나뭇잎 지기 전 남겨야할 한 해의 가을이다. 볕이 좋은 날이다. 한순간 꿈처럼 소순희 저 색깔 고운 가을녘이면 님아 죽음보다 깊은 잠도 헛되지 않으리 결국은 너와 나 황혼의 가을 속에 눕는 일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거니와 목멘 기다림도 구석기 유물처럼 무딘 족쇄의 구속인 걸 지상의 살아 있는 것이 숨죽여 침묵할 때 가만히 침잠하는 몹쓸 놈의 잠도 귓바퀴를 돌다 쉬이 거두어들이는 그늘 속에 다시 빈손으로 접는 긴 산 그림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점에서 서로 다른 뜻도 기어이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허망한 바람 같은 것 아니더냐 사랑도 한갓 생의 추임새로 신명 나더니 한순간 꿈처럼 지나온 세월 앞에 온순해지네 아,아 몰락함도 어차피 시린 너..

시와 사랑 2023.11.11

그 찻집에 가서

그 찻집에 가서 소순희 대추차 잘 다린다는 창 넓은 그 찻집에 가서 추적추적 가을비 내리는 한나절 안개 젖는 산 실루엣 배경에 시 하나 묻어 두고 올까 파초도 시들어 가는 문밖 풍경이나 끄적이다 올까 문득 여기까지 와 버린 가을 길도 없는 계절을 찾아온 저 무수한 흔적들에 경의를 표함은 그저 바라보며 마음 내주어 감탄할 일 뿐이다 2023

시와 사랑 2023.11.05

가을 안부

가을 안부 소순희 사랑하는 이여! 가을볕 찬란히 눈부시다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묻지만 꿈결 같은 날은 또 저렇게 속절없이 지고 우리는 이 가을 어디서 만날 것인가 붉은 색깔로 타오르는 맨드라미처럼 정녕 이 가을 속 알 수 없구나 내 삶이 느슨해질 때 곰삭은 가을 한쪽으로 다시 팽팽해지는 필연의 계절 나, 너로 인해 붉게 피가 잘 돌아 정신 맑은 가을이다 사랑하는 이여! 이 가을 잘 있느냐고

시와 사랑 202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