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유서 소순희 감나무길 풀 베는 늦여름 쓰러지는 풀들은 비명 한마디 없다 모조리 밑동 잘려 눕는 그 자리에서 향긋한 푸른 향기를 뿜는구나, 너희들 서슬푸른 낫 날에까지 몸 베이며 향기를 묻히는 간절한 전이에 나는 나대로 풀은 풀대로 슬프다 한 철 하늘의 기운 받아 저장한 몸냄새를 기꺼이 귀먹은 햇살 아래 뿌리는 일, 그것이 풀들의 유서란 걸 알면서 차마 말 못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 검은 씨앗 하나 숨어 있음을 보았다 - 2016 월간 모던포엠 7월호 시향의 숲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