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32

십이월의 눈

십이월의 눈 소순희 홀연히 떠나는 섣달의 그 밤 내 기억 속에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그 길이 어둔 밤길일지언정 가야 할 길은 열려있구나 침엽 낙엽수 가지에 걸린 하현의 쪽 달 어슴푸른 하늘길로 날개짓 하는 호접의 혼처럼 그대 설익은 한 그릇 사랑이 뭇 연인의 꿈이었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지어다 사랑했노라고 입속말로 거두는 지상의 슬픈 언어로 덮는 십이월의 눈, 눈

시와 사랑 2022.12.18

청령포에 가거든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맘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금부도사 왕방연- 단종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는 관음송(수령600년 높이30m 둘레5.10)> 청령포에 가거든 소순희 그대에게 남은 마지막 말 한마디도 녹취하지 말라 진실은 언제나 떠난 뒤에 밝혀지는 법 외면의 여름날은 그대 두고 멀어지는가 주군의 예감은 필정이었으리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눈물로 봉인된 치욕의 계절도 석양에 물들어 한갓 욕된 일기에 불과하니 기록한들 무엇하랴 송림 사이로 뻗는 억지 죄 길은 어디까지가 의문인가 유배지 청령포에 가거든 그대 산 넘고 물길 멀어도 서강 흐름에 옛것 아님을 서러워 마라 홑 것 빈 껍질만 물가에 남더라도 남은 마음 한 자락..

시와 사랑 2022.11.24

육십령에서

육십령에서 소순희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길이 어디서 끊기냐고 막상 더는 갈 곳 몰라 돌아선 발끝에 낙엽만 채인다 목적 없는 길손이 지났을 법한 안개비 젖는 길 새들은 이미 먼 곳으로 가고 빈 둥지만 허공에 쓸쓸하다 등 떠미는 바람도 여기선 별일 없다는 듯 바짓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간다 철들지 않은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절박한 뿌리마저 저 홀로 숨 가쁜 육십령에서 이제는 왔던 곳으로 회귀하고픈 안빈낙도, 나지막한 산울 두른 집 나 거기 돌아가 못다 꾼 꿈 가벼이 내리고 싶다 2022 그 무섭다는 고개를 무난히 올라와 돌아본 내 나이 육십령! 어디 끊긴 길 있으랴만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자식들 떠나간 둥지엔 바람도 사무친다. 이제 못다 이룬 꿈을 위해 고요히 사는 일만 남지 않았는가!

시와 사랑 2022.10.21

내가 나에게

내가 나에게 소순희 햇살 고운 가을 하나쯤 마음에 숨겨 두고 살 일이다 철 늦은 쑥부쟁이 지상의 계절을 힘겹게 오르는 산길 하나쯤도 마음에 새겨 두고 살 일이다 세상의 저물녘에 내 안의 헛됨 가르며 산새가 날면 숨겨둔 뜻 풀어 비로소 마음 여는 이치 알겠거늘 덧없는 한 생을 지나며 천명(天命)을 거스르느냐 모국의 가을 깊을수록 나는 남아 바람처럼 떠돈다 2011

시와 사랑 2022.10.13

유서

유서 소순희 감나무길 풀 베는 늦여름 쓰러지는 풀들은 비명 한마디 없다 모조리 밑동 잘려 눕는 그 자리에서 향긋한 푸른 향기를 뿜는구나, 너희들 서슬푸른 낫 날에까지 몸 베이며 향기를 묻히는 간절한 전이에 나는 나대로 풀은 풀대로 슬프다 한 철 하늘의 기운 받아 저장한 몸냄새를 기꺼이 귀먹은 햇살 아래 뿌리는 일, 그것이 풀들의 유서란 걸 알면서 차마 말 못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 검은 씨앗 하나 숨어 있음을 보았다 - 2016 월간 모던포엠 7월호 시향의 숲 수록

시와 사랑 2022.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