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33

유서

유서 소순희 감나무길 풀 베는 늦여름 쓰러지는 풀들은 비명 한마디 없다 모조리 밑동 잘려 눕는 그 자리에서 향긋한 푸른 향기를 뿜는구나, 너희들 서슬푸른 낫 날에까지 몸 베이며 향기를 묻히는 간절한 전이에 나는 나대로 풀은 풀대로 슬프다 한 철 하늘의 기운 받아 저장한 몸냄새를 기꺼이 귀먹은 햇살 아래 뿌리는 일, 그것이 풀들의 유서란 걸 알면서 차마 말 못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 검은 씨앗 하나 숨어 있음을 보았다 - 2016 월간 모던포엠 7월호 시향의 숲 수록

시와 사랑 2022.09.24

덩굴손

덩굴손 소순희 허공에 바람의 뼈를 감고 오르는 그 연약한 힘도 때로는 저희끼리 감고 감아 뭉텅이 진 주먹은 또 허공을 감는다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새 한 마리 길을 트는 저녁 무렵에야 알아가는 무딘 안목도 서둘러 제 몸 밖으로 손을 뻗는다 천상에 오르는 길 어디냐고 묻는 말에 간지럼 타는 하늘 한 쪽이 남긴 붉음도 어차피 감고 가야할 일이라면 덧없다 하지마시라 2022

시와 사랑 2022.08.03

여름비

여름비 소순희 투둑투둑 나뭇잎에 비듣는 소리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배롱나무 붉은 꽃 터지는 소리였구나 내 피도 붉게 온 몸을 잘 돌아 또 한해 푸른 피 잘 도는 여름을 맞네 2022 조영제 투여 CT검사 판독 결과, 심혈관이 부분적으로 50% 막혀 있다는 주치의의 설명이다 . 올 여름도 왕성한 푸르름의 피가 잘 도는데 나도 주님 은혜 가운데 온 몸 피가 잘 돌아 또 한해 여름을 맞이한다.

시와 사랑 2022.07.30

살구나무가 있는

살구나무가 있는 소순희 아가, 세상 어디에도 내 맘대로 된 일은 없느니라 어디에 뿌리 내리든 굳게 살아가거라 거대한 직벽 산 볕 한 줄기 들지 않는 아파트 사이 키 큰 나무들 머리 들어 가리운 틈새에서 하늘 한 조각 허다한 죄처럼 이고 선 허리 휜 내 어머니 같은 살구나무여! 살아보겠다고 안간힘 쓴 등걸에 봄바람 스쳐 지나자 눈물 같은 꽃 몇 개 시절 알아 피워냈구나 다만, 봄이라고 모두 희희낙락거릴 때 봄밤 뒤척이며 돌아눕는 허술한 쪽잠에도 꿈은 돋아나 서러워할 이유 없이 봄이 깊다 절망도 이쯤에선 아름다운 법 다시, 봄은 어머님 말씀 아가, 어디 있든 배곯지 말고 살아라 2022

시와 사랑 2022.04.19

그리운 전화

그리운 전화 소순희 엥간허면 한 번 댕겨 가그라 밤이면 소쩍새 울어쌓고 참말로 적적허다 시방, 우리집 울타리가에 개 복숭꽃이 훤하다 나도 아츰에 벌건 꽃 보고 화들짝 놀랬다 날씨 땃땃허면 알아서 꽃 피고 바람도 몸에 보드랍게 갬긴다 사는 일 뭐 별거냐 이런 것이 세상 사는 이치 아니냐 꽃지기 전에 핑 댕겨 가그라 꽃도 좋지만 니 얼굴 많이 보고잡다 2018

시와 사랑 2022.04.13

유산

유산 소순희 아부지의 유산을 정리하고 손 털고 돌아서는 늦은 밤 서리 밟는 달빛 온누리에 희다 쭉정이 같던 아부지의 한 생도 기막힐 노릇인데 달밤마저 기차게 아득하구나 맘 풀려 느슨한 중년의 세월 서릿발 선 고향의 달밤은 정신 바짝 들게 볼을 부벼 왔다 이처럼 살아 있다는 것은 진정 아름다운가! 유년의 달빛 마당 오줌발로 서리 위에 그리던 김 나던 추상화 한 점이 내게 남은 부요인 걸 누가 알기나 했으랴. 2009

시와 사랑 2022.03.12